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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8 (화)

내 자신을 돌아볼 공간, 누구에게나 공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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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사진 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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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친구들과 놀던 공터가 생각난다. 우리 동네에는 빈 땅이 많았다. 집 앞 좁은 골목을 지나면 마을 어귀에 못 미쳐서 있던 공터들. 그중에서 내가 많이 놀았던 공터는 원래 산의 끝자락이었나 보다. 약간 높은 언덕배기를 이루고 있던 그 공터는 듬성듬성 뿌리가 뽑힌 나무가 아슬아슬하게 흙더미를 이고 서 있었다.

내가 그 흙 비탈을 혼자서 오를 수 있었던 나이는 여섯 살쯤이었다. 그 전까지는 동네의 언니 오빠들이나 또래의 운동신경이 발달한 친구들의 손을 잡고서야 겨우 올라갔다. 그 언덕배기 공터에서는 다양한 놀이가 진행되었다.

남자아이들은 주로 전쟁놀이를 하였는데, 이것은 요즘 돈을 내고 즐기는 방 탈출 게임과 비슷한 놀이였다. 부러진 나뭇가지를 총을 삼아서 ‘두두두두’ 난사하면 다들 죽는 시늉을 실감 나게 하곤 했다. 여자아이들은 공기놀이나 고무줄놀이를 했다.

그곳 말고도 놀 공간은 많았다. 제일 흥미진진했던 공간은 천막 창고였다. 장롱을 만드는 공장에서 장롱을 보관하던 곳이었다. 그 창고는 안이 미로처럼 복잡하게 되어있는 데다 어두컴컴해서 우리는 그곳을 귀신이 나오는 집이라고 불렀다. 그 창고 안은 숨바꼭질하기에 좋았다.

싸구려 합판에서 나오는 지독한 약품 냄새 때문에 오래 숨어 있으면 어질어질해지기도 했다. 지금 그 곳들의 땅값을 환산하면 얼마쯤 될까? 지금은 높은 아파트 건물로 둘러싸인 서울 주택가이니 꽤 비쌀 것이다. 어린 시절 가슴 한 켠에 꼭 박혀 있는 공터. 나는 요즘도 주변에 그런 공터가 있을까 해서 두리번거린다.

우리 집 앞마당이나 집 앞 작은 골목보다는 크고 학교 운동장보다는 작은 우리들의 놀이터. 그 놀이터에서 우리는 싸우기도 하고 놀기도 하면서 한 뼘씩 자랐다. 그런 휴식 같은 공간이 그립다. 아무나 만만하게 이용할 수 있고 동네 사람들이 모여 수다를 떨 수 있는 곳 말이다.

우리의 얼굴에도 공터가 있다. 눈, 코, 입 외에도 뺨이나 이마, 턱 등은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공터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곳 들은 이목구비 못지않게 중요하다. 관상 책을 보면 이마나 턱, 광대 등은 전체적인 운세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예를 들어 ‘이마가 반듯하고 광이 나면 학식 운이 있고, 턱이 적당히 살집이 있으면 말년이 좋고’ 등이다. 또 코가 아무리 잘 생겨도 광대가 받쳐주지 않으면 주위 도움을 받지 못한다는 등 얼굴에서 이런 공터의 역할은 중요하다.

생활에서도 공터가 필요하다. 젊은 시절의 나는 인상이 나빴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니 생각이나 행동이 분주하고 빡빡해서다. 그때는 일초 일분도 아까워서 종종걸음으로 걸었다. 사람들과 대화할 때는 내가 하고 싶은 말만 일방적으로 쏘아대듯이 말했다. 옷집에 가서 옷을 고를 때는 직원이 권하는 것을 대충 사가지고 와서 마음에 들지 않아 나중에 후회하기도 했다.

그렇게 여유가 없는 내가 인상이 좋을 리가 있었겠는가? 대화가 아닌, 일방통행식의 말을 누가 듣고 싶었을까? 그런 여유 없음은 양미간에 주름이 잔뜩 잡히게 하고 웃음기가 없는 얼굴을 만든다. 그런 사람과 같은 공간에 있다면 빨리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들 것이다.

사람에게 공터가 되어주는 사람도 있다. 우리 딸은 입시생이다. 요즘은 점점 더 신경이 날카로워지는지 말끝이 늘 서 있다. 밥 먹으라는 말 한마디만 했을 뿐인데도 신경질을 내면서 싫다고 한다. 할 일이 너무 많다면서 시간이 없단다. 밥 먹을 시간도 없느냐고 하니 화를 낸다. 엄만 자기가 얼마나 힘든 줄 몰라서 그런다면서.

‘나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차려준건데.’ 하면서 속으로 삭히려니 부아가 치민다. 그래도 참아야 한다. 엄마니까. 내가 이런 ‘감정의 공터 배역’에서 중도하차한다면 우리 딸은 어디에 가서 긴장감을 해소하겠는가? 엄마는 자식들에게 화풀이 대상이자 기댈 곳이다. 그나마 공터로라도 여겨주는 게 감사하다고 생각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목소리를 들려주거나 얼굴만 보여줘도 감사하게 될지도.

이런 공터는 어디든 있어줘야 한다. 바쁘게 지나치는 생활 속에서도 문득 문득 자신을 돌아볼 공간. 또는 그런 사람, 그런 표정은 모두 소중하다. 나에게 성장과 휴식을 제공할 공터 말이다. 어른이 되어서 어린 시절 뛰어 놀던 공터에 찾아가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온통 아파트가 들어차서 어디가 공터였는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내가 사는 하루하루는 사실 이보다 더 빽빽한 것은 아닐까? 어린 시절 놀던 골목길도 앞마당도 ‘공터’라는 말도 모두 생소해져버렸다. 모두 다 빽빽하다. 땅값이 비싸졌으니 그런 공터는 기대할 수 없게 됐다. 대신 돈 들지 않는 것에 호사스럽게 공터를 만들어보자.

예를 들어 집에는 되도록 가구를 적게 두고 물건수를 줄이는 것이다. 청소하는 시간이 줄어들어 시간에도 공터가 생길 것이다.

알고 보면 돈이 들지 않는 ‘공터 만들기’는 많다. 내 머릿속에 공터를 만드는 게 우선이지만 말이다.

[허윤숙 작가/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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