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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 (금)

정책위한 연구개발 아닌, 연구개발위한 정책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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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조천호의 파란 하늘]

정책을 위한 연구개발은 실패의 길

새 가치 만드는 사람 존중해야 성공

기상청 과학이 중심이어야 제 기능

재해·환경 해결 아웃소싱 안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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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 시절 청와대에서 열린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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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국립기상과학원장


자연재해와 지구환경에 대응하려면

대한민국 헌법에서 국가는 재해 예방과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해야 하며 환경 보존을 위해 노력해야 함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국가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이에 걸맞은 종합적인 기술 시스템을 개발하고 운영해야 합니다. 국가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부분 과학기술은 연구자 개별 수준이 아니라 종합적인 시스템의 차원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자연재해와 지구환경 분야의 업무 역량은 기술개발 수준에서 결판납니다. 그러므로 과학기술은 국가 과제를 해결할 수단을 넘어 핵심이 되어야 합니다. 과학기술의 깊이가 깊을수록 창조적이고 유연한 적용이 가능하여 새롭고 다양한 정책을 펼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학기술이 핵심이 아닌 정책은 구호를 내걸었으되 그것을 추진할 수단도, 역량도 가질 수 없습니다.

실제 정책 결정과 연구개발은 관료적 위계체계에서 이루어집니다. 위계체계는 그 상위가 모든 정답을 알고 있다는 전제에서 운영됩니다. 하위에 놓여 있는 과학기술은 정책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취급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기술 정책 관료가 기술의 수준과 연계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할 수 있습니다. 정책은 연구자에 대해 지시와 관리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와는 동떨어진 수사와 개별 사업을 모으고 조정하는 것으로 정책 기능을 대신할 가능성이 큽니다.

자연재해와 지구환경에 대응하려면, 정책을 위해 연구개발이 필요한 게 아니라 연구개발을 위해 정책이 필요합니다. 국가 기술 시스템을 만들어 본 사람은 압니다. 끝없는 시행착오, 실패의 연속과 의미 없어 보이는 단순 작업의 반복을 통해서만 겨우 조금씩 실질적인 가치를 쌓아 올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스템적인 속성을 가진 국가 기술혁신은 통합, 연결, 누적이 그 본질적인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단박에 해결할 수 있는 비책은 없습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모든 문제가 이미 해결되었을 겁니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홍성주 박사가 지적했듯이, 정부의 정책과 투자, 연구개발 기획, 연구개발 수행과 성과까지 연구개발 과정의 전 주기에서 권한과 책임이 수직 라인을 따라 분산됩니다. 위계체계에서는 여러 단계를 거치기 때문에 의사결정에 대한 권한과 책임이 불분명합니다. 이 때문에 사업이 성공하면 숟가락을 들고 나타날 사람이 많지만, 실패하면 책임져야 할 사람이 불분명합니다.

정책결정자에게 권한은 몰아주고 책임질 사람은 없는 구조입니다. 그러니 정책결정자는 그 분야를 잘 몰라도 겉포장이 화려한 사기성이 짙은 과제에 주저없이 뛰어들 수 있습니다. 정책결정자의 실적을 위해 국가 과제를 도박에 맡기는 꼴이 됩니다.

또한 관료적 위계체계는 그 특성상 수평적인 대화와 협력이 필수적인 연구개발 조직을 하부 구조로 취급합니다. 이는 과학기술을 오히려 억압하는 데 작용하여 연구개발 조직 문화를 침체시킵니다. 실질적인 가치 창출은 위계를 따지지 않는 조직과 과학기술에 높은 가치를 두는 조직 문화에서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 주체가 아닌 종속 기능을 위해 온 힘을 기울일 연구자가 있을까요?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에 대해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절대가치를 추구해야 연구에 몰입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성과를 올릴 수 있습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연구 개발 인력입니다. 연구개발이 투자한 만큼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사람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국가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연구개발의 성과는 연구비와 인력 규모보다는 시스템을 설계하고 구축하는 역량과 이를 달성하게 하는 인력 수준에 의해 결정됩니다.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사람을 존중해야 합니다. 이래야 국가 기술 시스템의 전체를 장악할 수 있는 과학기술자를 길러낼 수 있습니다.

자연재해와 지구환경 정책이란 연구개발을 이끌어가는 게 아니라 연구하는 사람을 지원하는 거라는 상식을 회복해야 합니다. 연구자에게 최고 수준의 연구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 성과와 비용면에서 가장 효율적인 정책입니다.

과학기술은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이 세계에 대해 합리적 사유를 통해 발전해 왔습니다. 결과가 아니라 태도가 과학의 본질입니다. 과학기술의 연구개발 역시 민주적이고 합리적으로 수행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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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광역시 대덕연구단지 전경.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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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과학을 살려야 기상청이 산다

국립기상과학원은 기상청 전체 연구개발비 중 약 11%만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본청에서도 연구개발을 아웃소싱으로 수행합니다. 그 대부분 과제의 목적은 국립기상과학원과 마찬가지로 국가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입니다.

국립기상과학원이 구축한 시스템은 항시 운영됩니다. 별일 없는 듯 돌아가는 이 시스템이 멈추면 기상청의 주요 업무가 탈이 나거나 멈출 것입니다. 과학원 스스로 개발하고 구축한 이 시스템은 기상청의 일상 업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본청에서 연구개발을 아웃소싱하지 않는다면, 기상청 업무는 불편한 수준에서라도 수행할 수 있을 겁니다.

국립기상과학원은 국가 기술 역량을 담보하는 시스템 차원의 기술을 지속적이고 전략적으로 연구개발해 왔습니다. 자연재해와 지구환경에 대한 국가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종합 시스템은 아웃소싱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문제 발생 시 신속히 대응하고 개선하기 위해서는 시스템 전체를 장악할 수 있는 자체 기술력을 갖추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웃소싱은 국가 종합시스템을 보완하고 호환될 수 있는 틈새 기술만 가능합니다. 대문으로 들어오는 것이 가보가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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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제주 서귀포로 이전한 국립기상연구소 표지석 제막식. 2015년 국립기상과학원으로 개칭했다. 기상과학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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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영국 기상청은 그 핵심부에는 관료체계가 아니라 과학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과학이 중심이고 내재화된 체계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인력이 전체 기술 시스템을 개발해 운영합니다. 이를 통해 현업 운영에 있어 미국을 능가하는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여기에 더해 영국기상청의 지구과학 분야 연구 능력은 세계 유수의 대학과 연구기관을 제치고 최고 수준입니다.

반면 우리 조직은 과학이 중심이 아니라 수단입니다. 위계의 가장 아래 하단에서 연구개발이 본청 내부, 과학원, 산하기관, 사업단과 위탁기관으로 분산되어 수행됩니다. 여기저기 연구개발 조직을 만드는 게 정책인가 봅니다. 뭔가 일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데는 효과적입니다.

이렇게 되면 전체 연구개발을 체계화시키기가 불가능하고, 연구 인력이 분산되고, 연구 중복성이 불가피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이 체계를 허물지 않는 한 앞으로도 비효율과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이 자연스럽지 않음의 자연스러움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4년 전 우리나라 가장 남쪽 끝자락에 국립기상과학원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많은 직원이 가족과 떨어지고 신규 연구원을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위치처럼 우리 역할도 주변부에 남아 있는 것이 우리의 운명은 아닙니다. 더군다나 정책결정자가 바뀌기만 하면 오락가락하는 본청에 힘을 보태주는 존재에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국립기상과학원이 주변부지만 언젠가 중심부에 있게 될 겁니다. 저는 이것만이 기상청을 살리는 유일한 길이라 믿고 있습니다. 과학이 중심에 서지 않으면 기상청의 그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이상이라고 치부하면, 현실의 모든 제약이 ‘지금 이곳’을 어찌할 수 없는 불가피한 곳으로 전락시켜버립니다. 이런 현실에서는 가치를 만들 수 없다는 걸 잘 알기에 우리 스스로 냉소로 상황을 견디게 됩니다. 이렇게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현실은 벽이 아니라 극복의 대상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를 살리게 될 것입니다. 대기과학자 cch070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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