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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3 (목)

공포와 불안감을 부추긴 반공주의의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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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이영미의 광화문시대

⑥ 60년대 후반~70년대 초반기의 세종로

60년대 전반기 ‘희망’과 ‘행복’의 상징

후반기 이후 ‘안보 위기’ 배경돼

67년 영화 ‘대괴수 용가리’가 대표적

중앙청 파괴 등 북한 남침에 비유

74년 임권택 감독 반공영화 ‘증언’

북한군에 점령당한 세종로 재현

영화진흥공사, 거액 제작비 부담

박정희 유신독재 구축 위한 포석


한겨레

1967년 김기덕 감독이 만든 <대괴수 용가리>에서 용가리가 세종로의 서울시청 건물을 파괴하고 있다. 일본의 괴수영화 <고질라>를 본뜬 <대괴수 용가리>는 중앙청과 서울시민회관 등 서울의 도심을 파괴하는 장면으로 유명하다. 휴전선 부근에서 솟아오른 용가리의 행로는 북한의 6·25 남침 경로를 연상케 한다. 박정희의 3선 개헌을 앞둔 시점에서 나온 이 영화는 반공주의를 강화하는 데 일조를 한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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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찬 1960년대의 이미지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1960년대 전반기 영화 <마부>, <맨발의 청춘> 속의 세종로가 희망과 행복이 시작되고 현대적인 연애가 이루어지는 장소로 나타난 것과 달리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전반기까지 영화 속의 세종로는 또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 짓밟힘의 공포가 엄습하는 공간으로 나타난 것이다.

1967년은 한국영화사에서 아주 실험적인 두 편의 장르영화가 제작되는 해이다. 하나는 한국 최초의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신동헌 감독)이며, 다른 하나는 본격적인 에스에프(SF) 괴수영화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감독·83·지난 7일 별세)이다. 나는 후자가 훨씬 더 무모한 실험이었다고 생각한다. <홍길동> 쪽이 만들기 더 쉬웠다는 얘기는 아니다. 둘 다 어마어마하게 무모한 ‘맨땅에 헤딩’ 수준이다. 하지만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의 성공 여부는 순수하게 기술과 자본에 달려 있는 문제임에 비해 <대괴수 용가리> 같은 작품의 성공은 그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괴수 용가리>는 괴수영화인 동시에 에스에프 영화이기도 하다. 봉준호 감독의 <괴물>에서는 한강에서 나온 괴물을 강변 둔치에서 오합지졸이나 다름없는 시민의 힘으로 물리친다. 그러나 <대괴수 용가리>는 괴수를 첨단과학의 힘으로 물리친다는 에스에프적 설정을 했다는 점에서 <괴물>과 다르다. 에스에프란 장르가 현실적 개연성을 크게 뛰어넘는 심한 허구를 전제로 한 것임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관객이 상황에 몰입하려면 엔간한 정도의 현실적 설득력을 갖추어야 한다. 생각해 보라. 탱크의 포탄(미국에서 수입했을 것임이 분명한)에도 끄떡하지 않는 무지막지한 괴수를 1967년 한국의 과학자들이 막아내다니 도대체 이런 설정에 관객이 몰입할 수 있을까.

일본 ‘고질라’ 본뜬 ‘대괴수 용가리’

<대괴수 용가리>가 제작되던 1960년대는 한국 영화가 양적, 질적으로 급성장하던 시기였다. 연간 제작 편수가 200편을 향해 달려가고 멜로, 코미디, 액션, 사극만이 아니라 괴기나 스릴러, 추리, 심지어 웨스턴에 이르는 온갖 장르의 영화가 다 만들어지던 때였다. 때마침 일본에서 1954년에 처음 만들어진 괴수영화 <고질라> 시리즈가 1960년대에 들어서서는 거의 해마다 제작될 정도로 인기를 모으고 있었다. 한-일 수교가 이루어진 뒤 일본 대중문화의 동향에 민감해졌고 그 결과 1967년 같은 해에 <대괴수 용가리>와 <우주괴인 왕마귀>(권혁진 감독)가 제작되었던 셈이다. <우주괴인 왕마귀>가 우리나라 기술자들의 손으로만 만들어졌다면, <대괴수 용가리>는 일본 기술자들을 불러와 미니어처를 만드는 등 그들의 노하우를 빌렸다.

그런데 일본과 우리나라는 상황이 다르다. 일본은 20세기에 세계대전을 치러본 경험이 있는 강국이고, 태평양전쟁의 패망에도 원자폭탄이라는 최첨단 과학의 힘이 개입됐다. 그런 점에서 과학의 힘에 대한 그들의 관심과 자부심은 우리와 비교할 수 없다. 즉 일본 첨단과학의 힘으로 재앙을 극복한다는 식의 서사가 비교적 대중들에게 호소력을 지닐 수 있을 만한 현실적 근거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에 비해 우리는 6·25도 유엔군의 힘으로 치렀다. 군의 기본 무기인 소총의 국내 개발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때였다. 과학자들이 지혜와 용기를 모아 외계인의 지구 침략에 맞선다는 식의 흔한 에스에프 서사는 미국이니까 가능한 발상이다. 아무리 특수효과를 잘 만들어낸다 하더라도 1960년대 우주로 발사되는 로켓에 탄 조종사가 한국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면 그것만으로 관객의 몰입은 바로 깨질 수밖에 없다. <대괴수 용가리>에서는 배우 이순재가 로켓 안에 타고 하늘로 올라가며 “궤도에 진입했습니다”라고 관제센터에 보고한다. 나는 <홍길동>과 <대괴수 용가리>를 초등학교 1학년 시절에 개봉하자마자 보았는데, <홍길동>에 비해 <대괴수 용가리>가 훨씬 ‘후지다’고 느낀 것은 바로 이런 대목 때문이었다. 아직도 한국에서 에스에프 영화가 잘 나오지 못하는 것은 단지 창작자 역량만의 문제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이런 엉성함이 조금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그나마 어린이영화라는 타깃 설정 덕분이다. 젊은 과학자와 함께 호기심 넘치는 초등학생 영이 결정적으로 용가리를 물리치는 아이디어를 내고 성공을 거두는 것이 결말이다. 당시 열 살짜리 남자아이들의 장래희망으로, 단골로 등장했던 대통령이나 대장 등을 넘어서서 우주탐험가(!)와 과학자가 대두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청소년 과학 잡지 <학생과학>이 창간된 것도 이즈음인 1965년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이런 영화는 당시 한국 과학의 현실과 무관하게 승리와 해피엔딩으로 결말 맺을 것임이 자명하니, 관객들은 내러티브에 대한 큰 기대가 없었다고 하는 편이 솔직한 얘기이다. 사실 이 영화를 보러 가게 만든 지점은 뉴욕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서울 거리를 용가리가 때려 부수고 다니는 장면이 과연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하는 궁금증 아니겠는가. 실제로 영화의 거의 대부분은 용가리가 서울 거리를 부수고 다니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이를 위해서 아주 많은 미니어처가 제작되었다. 이 영화를 본 지 무려 50년이 지났음에도 내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장면이 용가리가 숭례문을 짓밟고 한강다리를 부수는 장면이었음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학생들 단체관람하게 했던 ‘증언’

이 영화는 바로 이 지점에서 현실적 호소력을 발휘했다. 용가리의 발에 중앙청과 시민회관이 맥없이 부서지고 불타 버리는 장면은 영화 전반부 최고의 장면이다. 북서쪽에 용가리가 나타났다는 보고에 탱크가 총출동하여 세종로 중앙청 앞을 지나 인왕산 쪽으로 향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사람들은 용가리의 출현에 놀라워하다가 정부가 방송으로 대피를 명령하자 미리 싸놓은 짐을 들고 재빠르게 피난길에 나선다. 이불보따리를 지고 가방을 든 사람들이 종종걸음을 치면서 거리를 메우고 있다. 이 장면은 재난영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상투적 장면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각별한 기시감을 느끼게 한다. 세종로를 오가는 탱크와 피난 행렬, 불과 15년 전에 겪었던 전쟁과 피난살이의 경험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용가리의 침략이란 북한 침공의 메타포로 읽히기에 충분하다. 이는 관객의 적극적 해석에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창작의 의도에서도 이러한 반공주의적 설정은 노골적이다. 용가리는 하필 휴전선 부근에서 땅을 가르고 솟아올랐고, 가장 먼저 부수는 것이 판문점이다. 그리고 인왕산을 넘어 중앙청 뒤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중앙청과 시민회관을 부순 용가리는 태평로를 지나 서울시청을 부수고 남산을 헤집어 놓고 한강다리에 이른다. 북한군 침공의 육로 코스 그대로이다. 북쪽에서 내려온 적에게 세종로가 짓밟힌다는 것, 이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생생하게 지닌 공포와 불안감의 핵심을 찌른 것이다.

1967년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기였다.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 총선거가 있는 해였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끝낸 정부는 3선개헌을 하기 위해 두 선거에서 압승해야만 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장기집권을 위한 온갖 무리한 짓이 자행되고 권위주의적 행태가 노골화되었다. 박정희 정권의 민정 제1기에는 없었던 일들이다. 하필 이듬해인 1968년 1월에 무장공비가 청와대를 향해 내려와 에스에프 영화 속의 공포가 현실임을 증명했다. 그해 국민교육헌장이 공포되었고, 1969년에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교련교육이 의무화되었다. 아다시피 3선개헌을 밀어붙여 1971년에 세 번째 대통령선거를 치르게 된 박정희는 젊은 야당 후보 김대중에게 간신히 이겼고, 이듬해인 1972년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며 10월 유신을 단행했다. 1960년대까지 겨우 유지하고 있던 삼권분립 같은 민주주의 기본 원칙을 완전히 무시하고 대통령 간선제로 종신집권이 가능하도록 만든 희한한 헌법이었고, 이에 반대하는 대학생 조직인 민청학련을 잡으려고 맞춤법령(!)인 긴급조치 4호를 발동해 주동자 8명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결국 1975년에는 이 흐름의 끝장판인 긴급조치 9호가 발효되어 학내 집회의 전면 금지와 총학생회 해체가 단행되었다.

사법살인인 인혁당(인혁당 재건위) 사건과 민청학련 사건이 터지기 몇 달 전인 1974년 1월1일에 영화 <증언>(임권택 감독)이 개봉되었다. 노골적인 국책 반공영화로, 다작을 하며 버텨오던 B급 감독 임권택은 이 대작을 통해 주류의 감독으로 성장한다. 탱크가 동원되고 포탄이 터지며 군부대 이동과 전투기 습격 장면 등을 담아야 하는 이런 전쟁영화에는 늘 정부의 지원이 있었는데, 이 영화에는 한국영화사상 최고의 지원이 이루어졌다. 제작비도 한국영화사상 최고였다. 이런 영화를 누가 제작했을까? 1967년 선거 직전에 개봉된 노골적인 홍보영화인 <팔도강산>(배석인 감독)이 <대한뉴스>를 만드는 국립영화제작소의 작품이었다면, <증언>은 영화진흥공사의 제작이다(제작이사 정진우). 그저 ‘국책’을 반영한 정도가 아니라 노골적으로 공기업이 돈을 대어 만든 영화인 것이다. 학교와 직장에 조직적인 관람을 유도했고, 중학교 2학년생이던 나도 학교 단체관람으로 이 영화를 보았다.

광화문은 콘크리트로 날림 ‘복원’

이런 정세에서 만들어지는 영화에는 북한군 침략의 공포를 구태여 메타포로 표현할 필요가 없다. ‘솔직담백단순무식’하다고 하면 심한 말일까. 개봉 당시에도 <동아일보>의 평(1.12)에서 ‘반공사상을 너무 정면에 내세웠고 공산주의자들을 피상적으로 묘사’했다고 비판받았다. 정치에서 민주주의의 껍데기조차 벗어버렸듯이 영화에서도 돌려 말하지 않는 ‘돌직구’로 들이민다. 이미 25년 전에 보았던 장면, 머릿속에서 수없이 반복 재생한 공포스러운 경험, 즉 6·25가 터져 세종로가 북한군에게 점령당하는 장면이 고스란히 영화 속에서 재현되었다. 물론 이 장면은 이미 풍경이 달라진 세종로에서 촬영될 수 없었고 미니어처를 만드는 방식으로 처리했다. 남부여대의 피난 행렬과 허리 꺾인 한강다리 장면도 당연히 들어 있다. 이 두 이미지야말로 6·25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가장 선명한 장면일 터이다.

이렇게 영화에서 짓밟히는 세종로를 그려내며 안보 위기가 부추겨질 때 현실 속의 세종로에는 광화문이 다시 들어섰다. 광화문은 1927년 조선총독부가 들어서면서 해체되어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의 북쪽으로 옮겨졌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흥선대원군이 1865년 다시 세웠는데 불과 60여년 만에 굴욕적으로 이전된 것이다. 그나마 이전된 광화문은 6·25 때 폭격으로 불타버렸다. 그런 것을 박정희 정권이 1967년 재집권에 성공한 뒤 그해 11월에 중앙청 앞쪽으로 옮겨 재건한 것이다. 말은 복원이었지만 완전한 복원은 아니었다. 이미 존재하는 중앙청과 도로 등을 고려하다 보니 위치가 조금 달라졌고 목조가 아닌 콘크리트로 세워졌다. 당시에도 문화재 복원으로서는 무의미하다는 비판이 제기되었으나 그냥 밀어붙여져 12월12일에 준공됐다. 늘 그랬듯 속전속결이다. 광화문 중앙의 대문은 높은 분이 중앙청으로 들어가는 자동차 전용 통로가 되었고 광화문의 콘크리트 서까래 아래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로 한글 현판이 걸려 이 문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실히 보여주었다.

목조건물과 달리 콘크리트로 지으면 천년을 간다고 선전하며 지었던 콘크리트조 광화문은 50년도 못 가 헐렸다. 제 위치를 찾고 목조건물로 복원된 현재의 광화문이 2010년에 완공됐다. 그리고 2009년 티브이(TV) 드라마 <아이리스>는 광화문을 복원 중인 세종로에서 북한 테러조직과의 격렬한 총격전 장면을 촬영했다.

한겨레

유신 시대인 1974년에 나온 영화 <증언>(감독 임권택)은 ‘상기하자 6·25’를 표방한 노골적인 반공영화였다. 당시까지 최대였던 이 영화의 제작비는 영화진흥공사가 댔으며, 중고생들의 단체관람이 이뤄졌던 사실상의 관급 영화였다. 6·25 때 폭파된 한강 인도교를 재현한 미니어처를 관계자가 촬영에 앞서 살펴보고 있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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