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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 (일)

국정원 직원이 ‘모른다’고 잡아떼면 증거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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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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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대법 판결 문제점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민일영 대법관)는 16일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대선·정치 개입 혐의를 유죄로 인정한 항소심 판결을 파기하면서, 국정원 직원들이 사용한 트위터 계정이 담긴 전자우편 첨부파일을 증거로 인정하지 않았다. 대법원은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내면서 명시적으로는 “선거·정치개입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증거 인정 범위를 1심과 같이 판단해, ‘정치 개입은 맞지만 선거 개입은 아니다’라고 해 ‘지록위마 판결’이라는 비판을 받은 1심의 손을 들어준 꼴이 됐다.

■ 국정원의 ‘모르쇠’ 전략 대법에서 인정

대법원이 증거에서 제외한 ‘425지논’과 ‘시큐리티’ 파일은 국정원 안보5팀(트위터팀) 김아무개씨의 전자우편 첨부파일이다. ‘425지논’은 ‘4월25일 논지’라는 뜻으로 추정된다. A4 용지 420장 분량인 이 파일은 2012년 4월25일부터 그해 12월5일까지 매일 원 전 원장이 내린 지시사항의 요점이 담겨 있다. A4 19장 분량인 ‘시큐리티’ 파일에는 김씨가 쓴 트위터 계정 30개와 비밀번호, 다른 요원의 이름 앞 두 글자와 이들이 쓴 것으로 보이는 계정들이 나열돼 있다. 여기엔 김씨의 트위터 활동 내역과 함께 리트위트할 우파 논객 트위터 계정, 팔로어 늘리는 방법도 적혀 있다. 검찰은 이 파일에 적힌 계정들을 출발점으로 삼아 연결 계정 1157개와 78만6698건의 트위터 글을 찾아냈다. 국정원의 정치 개입과 선거 개입을 인정할 결정적 증거들이었다.

하지만 김씨는 1심 법정에서 “전자우편은 내가 쓴 게 맞지만 첨부파일은 누가 썼는지 모른다”고 했다. 첨부파일엔 김씨만 알 수 있는 활동 내역이 날짜와 장소별로 기록돼 있었지만 김씨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1심은 작성자가 법정에 나와 “내가 쓴 게 맞다”고 인정해야만 증거로 채택하는 형사소송법의 ‘전문법칙’ 규정을 근거로 들어 두 파일을 증거로 삼지 않았다. 국정원 직원이 시인한 일부 계정 및 이 계정과 자동전파 프로그램(트위트덱)으로 연결된 계정 등 총 175개 계정이 쓴 글 11만3621건만 증거로 인정했다. 그 결과 1심은 트위터 내용이 정부를 홍보하거나 야당을 비판하는 내용이어서 정치 관여는 맞지만, 선거를 앞두고는 오히려 글이 감소해 선거 개입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대선개입 핵심 증거 된
국정원 직원 ‘이메일 첨부문서’
“당사자가 썼다고 해야 증거”

국정원 트위터글 증거 인정
11만건→27만건→다시 11만건
고법, 유·무죄 판단 다시 해야


하지만 항소심은 두 첨부파일을 모두 증거로 인정했다. 형사소송법은 당사자가 작성을 부인해도 업무상 문서 등 특별히 내용의 신뢰성이 담보되는 경우엔 예외적으로 증거로 인정하는 규정도 두고 있다. 두 첨부파일이 바로 이 업무상 문서에 해당한다고 봐, 증거가 크게 늘었다. 항소심은 두 파일에 있는 계정을 바탕으로 트위터 계정 716개가 쓴 글 27만4800건을 증거로 인정했다. 판단 대상이 늘어나니 선거 개입 여부도 명확해졌다. 2012년 8월 박근혜 대통령이 새누리당 대선 후보로 결정된 시점부터 ‘일반 정치 글’ 비중이 줄고 ‘선거 관련 글’이 증가한 사실이 통계로 확인됐다. 이를 근거로 원 전 원장의 선거법 위반 혐의를 유죄로 판단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법원은 첨부파일 2개는 ‘업무상 문서’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업무상 문서’는 “작성자가 업무상 기계적·반복적으로 작성해 허위가 개입될 여지가 없고 고도의 신용성이 있는 것을 의미하는데, 두 파일의 내용은 출처가 불분명하고 작성자가 기계적으로 반복해 작성한 건지 알 수 없어 업무상 작성된 통상 문서로 볼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2007년 성매매 여성들이 영업에 참고하려고 상대 남성의 전화번호 및 성매매 방법 등을 메모지에 적어둔 내용을 업무상 통상문서로 인정한 바 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사무총장인 조영선 변호사는 “대법원은 디지털 문서에 전문법칙의 예외를 쉽게 인정해왔는데, 이번 판결에서는 엄격한 입장에 따라 예외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평했다.

■ 파기환송심 판단은?

대법원은 항소심이 인정한 27만여건 중 16만여건의 트위터 글을 제외하고 사실상 1심과 같이 11만건만 증거로 인정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파기환송심에서 추가 증거가 인정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대선·정치 개입에 대한 판단을 회피했다. 그러나 두 첨부파일이 전체 증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에 파기환송심에서 추가로 트위터 글 등이 증거로 인정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증거로 인정된 트위터 글 규모가 대폭 축소되면 1심처럼 선거법 위반 혐의에 무죄 판단이 나올 가능성이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심에서 인정한 증거 11만건에 바탕해서도 충분히 선거 개입 목적을 인정할 수 있다는 반론도 있다. 한 검찰 관계자는 “대법원이 증거로 인정한 글 11만건을 바탕으로 1심처럼 선거법 위반은 무죄라고 판단할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11만개를 바탕으로 선거법 위반을 유죄로 인정할 수도 있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이경미 기자 km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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