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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0 (월)

미쓰비시 끌려가 손가락 잘려…일제 강제노역 피해 할머니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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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고 김성주(오른쪽) 할머니가 지난해 3월 7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강제동원 정부 해법을 규탄하고 일본의 사죄 배상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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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살 나이에 일본 군수공장으로 끌려가 죽음의 공포를 경험한 김성주 할머니가 일본의 사죄를 받지 못한 채 결국 세상을 떠났다. 향년 95.



사단법인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은 “경기도 안양시에 머물던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1차 소송 원고 김 할머니가 5일 노환으로 별세했다”고 6일 밝혔다.



1929년 전남 순천시에서 태어난 김 할머니는 일제강점기 수탈로 가세가 기울자, 1944년 5월께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돈을 벌게 해주고 공부도 시켜준다”는 일본인 교사의 말에 속아 일본행을 결심했다. 앞서 그의 아버지는 1942년 경남 진해 비행기공장으로 강제동원됐고 다음 해 어머니는 병으로 세상을 떠난 상황이었다.



김 할머니는 일본 나고야 미쓰비시중공업 항공기제작소에 도착해 해방 때까지 아침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두 달이 지났을 때 비행기 동체 철판을 자르는 일을 하다 왼손 집게손가락 한마디가 잘렸다. 봉합 수술은 받았지만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장애가 생겼다.



같은 해 9월 작은아버지가 보낸 전보를 통해 김 할머니는 6살 남동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 할머니는 동생을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집으로 보내달라고 했지만 공장 기숙사 사감은 거부했다.



한겨레

1944년 일본 나고야성 앞에서 촬영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순천소대 모습. 붉은 원 안 소녀가 김성주 할머니다.자서전 갈무리


이듬해에는 집에서 온 편지로 세 살 아래 동생 김정주(92) 할머니도 일본 후지코시 강재공업주식회사 도야마공장에서 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정주 할머니는 ‘언니를 만나게 해주겠다’는 같은 일본인 교사의 꼬임에 빠진 것이었다.



1944년 12월7일 발생한 도난카이 대지진 때는 건물이 무너져 광주·전남 출신 친구 6명이 죽었고 김 할머니도 대피하던 사람들에게 밟혀 왼쪽 발목이 꺾여 평생 굽이 있는 구두는 신지 못했다.



해방 뒤 귀국해 가족들을 다시 만났지만 고통은 이어졌다. 일본인들은 집으로 임금을 보내주겠다고 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1947년 18살 나이에 결혼했으나, 김 할머니를 ‘일본군 위안부’로 오해한 남편은 그를 때리고 구박했다. 김 할머니는 2021년 1월 펴낸 자서전 ‘마르지 않은 눈물’에서 “내 평생 가슴 펴고 큰길 한번 다녀 보지 못하고, 뒷질(뒷길)로만 뒷질로만 살아왔다”고 밝혔다.



김 할머니는 또 다른 강제동원 피해 생존자인 양금덕 할머니 등과 함께 일본 법원에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피해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지만 2008년 11월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끝내 패소했다. 일본 정부는 2009년 김 할머니 등 원고들에게 뒤늦게 후생연금 탈퇴수당금 명목으로 99엔(한국돈 900원)을 지급해 비난을 샀다. 할머니는 2012년 한국 법원에 다시 소송을 걸었고 2018년 11월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다.



원고들은 미쓰비시가 배상을 거부하자 미쓰비시중공업의 한국 내 자산에 대한 강제집행을 단행했고 김 할머니도 미쓰비시중공업 특허권 2건을 압류했다. 하지만 2022년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며 ‘제3자 변제안’을 내놓으며 다시 마음의 상처를 줬다. 제3자 변제안은 국내 기업들이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에 기부금을 조성해 강제동원 피해자에게 판결금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일본 기업도 지원에 참여할 수는 있으나 피고인 미쓰비시와 일본제철은 돈을 내지 않는다.



그는 2023년 3월 국회에서 열린 강제동원 정부 해법 강행 규탄 및 일본의 사죄배상 촉구 긴급 시국선언에 참여해 “일본 사람들이 우리를 끌고 갔는데 어디다 사죄를 받고 어디다 (배상을) 요구를 하겠느냐. 일본은 양심이 있으면 말을 해보라”고 마지막 울분을 토했다.



유족으로는 2남2녀가 있으며, 빈소는 안양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발인은 7일 오전 7시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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