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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 (일)

노무현 정부가 두차례 사면한 박경순씨의 영남위원회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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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부는 정권 출범 초인 2003년 4월 30일 특별 사면을 단행, 대공·학원 사범 등 1424명을 석방했다. 이 가운데 '영남위원회' 사건으로 1999년 대법원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박경순(57)씨가 있었다.

'영남위원회' 사건은 1998년 적발 당시 김대중 정부의 최대 공안사건으로 불렸던 대형 이적(利敵)단체 사건이다. 1998년 7월, 경찰은 박씨를 비롯해 부산·울산의 운동권 인사 15명을 국가보안법 제3조 '반국가단체'의 구성 혐의로 긴급 체포했다. 같은 해 9월 검찰은 박씨 등을 구속기소하면서 이들이 북한의 대남혁명 전위기구인 한민전(한국민족민주전선)의 지도를 받는 '반제청년동맹 영남위원회'의 일원으로 '김정일 보위투쟁'을 했다고 밝혔다.

1심 재판부는 "영남위원회는 북한 조선노동당 규약을 따랐고, 이들의 당면 목표는 자주·민주·통일이고, 궁극 목표는 온 사회의 주체사상 실현"이라면서 "박씨 등은 반국가단체를 구성하고 가입한 뒤 주체사상 전파를 목적으로 합법을 가장, 여러 사회·노동단체를 조직하거나 침투해 세력을 확장하고 사회혼란을 꾀하며 심지어 지방자치단체와 시의회까지 진출, 암약하는 등 그 죄상이 무거워 중형을 선고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총책으로 지목된 박씨에게는 징역 15년이 선고됐다.
조선일보

경찰이 1998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사한 '영남위원회'에서 압수한 각종 증거물.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영남위원회는 반국가단체가 아니고, 이적단체"라며 15명 중 12명은 집행유예 등으로 석방하고 박씨에게는 징역 7년에 자격정지 7년을 선고했다. 박씨는 대법원에서도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지난해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문에는 '강철 서신'의 저자 김영환씨, 하영옥씨 등이 '민혁당'을 만들었고, 영남위원회는 민혁당 아래의 도당(道黨) 성격을 지닌 하부 단체로, 박씨가 위원장이었다고 적시돼 있다. 영남위원회와 함께 민혁당의 하부 조직이었던 경기남부위원회의 위원장은 이석기 전 통진당 의원이었다.

5년가량 수감생활을 했던 박씨는 2003년 특별 사면 당시 잔형(殘刑·남은 형) 집행이 면제돼 석방됐고, 2년 뒤인 2005년 8·15 광복 60주년 특사 때 복권(復權)됐다. 박씨는 같은 정권에서 이례적으로 두 번의 사면을 받았다. 박씨가 사면을 받은 것은 '영남위원회' 사건 당시 자신의 변론을 맡았던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사실상 특별사면을 총괄하는 민정수석으로 있을 때였다.

이후 박씨가 언론의 주목을 받은 것은 10여년이 지난 지난해 '통합진보당 해산 사건' 때였다. 헌법재판소의 통진당 해산 결정문에 따르면 박씨는 민주노동당 부설 새세상연구소 부소장, 통진당 부설 진보정책연구원 부원장 등 옛 민노당·통진당의 핵심 당직자로 활동했다.

그는 통진당 해산의 주된 근거가 된 '진보적 민주주의' 도입에 상당한 이론적 근거를 제시한 것으로 나타났다. 박씨는 진보적 민주주의를 '민중주권 사상을 체현한 민주주의로 21세기 진보적 민주주의체제는 자본가 계급이 주도하는 자유민주주의의 계급적 제한성을 뛰어넘었지만, 아직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지양하는 사회주의 체제는 아닌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 체제'라고 정의했다. 헌재는 "'진보적 민주주의'는 궁극적으로 북한식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판단했고, 해산 결정의 중요한 근거로 삼았다.

[안중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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