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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3 (일)

새벽 별빛 아래 달리다 맞이하는 남태평양의 장엄한 일출[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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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판의 진주로 불리는 마나가하섬. 터키쉬 블루, 코발트 블루, 에머랄드 그린이 합쳐진 마나가하섬의 푸른 물결 위로 관광객이 패러세일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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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핫(hot)한 여행 트렌드 중 하나는 ‘런트립(Run+Trip·달리기 여행)’이다. 국내외에서 열리는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면서 관광도 하는 방식이다. 국내에서도 마라톤 대회는 교통이 통제된 도심 빌딩 숲을 달리거나, 지방 천년고도(古都)의 꽃길, 단풍 길, 천변을 달리며 색다른 여행을 한다. 해외 마라톤 대회는 자신에 맞는 코스를 달린 다음 남은 시간엔 여행도 즐기는 ‘펀런(Fun Run)족’이 많이 찾는다.》


● 사이판 국제마라톤 대회 참가기

남태평양 북마리아나 제도에 있는 사이판은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미국이다. 올해 17회를 맞은 ‘사이판 마라톤’은 시내 중심에 있는 마이크로비치(Micro Beach)에서 출발한다. 푸른 야자수와 코발트블루빛 바다가 보이는 해변도로를 달리며 탁 트인 바다 풍경과 열대 섬의 자연경관을 만끽할 수 있는 코스로 유명하다.

이달 8일 열린 올해 대회에는 19개국에서 온 612명이 참가했다. 한국에서도 200명 넘는 러너들이 참가했다. 마라토너이자 자선가로 유명한 가수 션, 철인 3종 경기를 완주한 배우 유이도 10km 코스를 달렸다.

기자도 원래는 취재만 하려고 왔는데, 대회의 생생한 분위기를 느껴보기 위해 5km 코스에 참가 신청을 했다. 그런데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뛰어 본다는 것. 얼마 만인가. 2001년 3월, 30대 초반에 내 인생 첫 마라톤을 뛰었다. 동아마라톤(현 서울국제마라톤) 하프코스(21km)였다. 당시 동아마라톤은 1970년 이후 30년 만에 서울 한복판을 달리는 코스로 변경해 서울국제마라톤으로 재탄생했다. 이후에도 모두 세 번 하프코스를 완주한 기억이 있다.

그런데 세월은 흘러 이제 50대 중반. 체중은 20kg이나 불었다. 평소 등산이나 걷기는 꾸준히 했지만, 누가 봐도 장거리를 뛰기에는 무리인 몸이다. 그래도 24년 전 하프코스를 달린 기억을 되새긴다. 마라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속 가능한 속도’. 천천히, 무리하지 않고,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뛰게 되면 뛸 수 있지 않을까.

사이판 켄싱턴호텔 앞 해변에서 마라톤 연습을 하고 있는 한국인 참가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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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판에 도착한 후 이틀 동안 해뜨기 전 일어나 달리기 연습을 했다. 첫날 연습 장소는 사이판 북부 별빛 관광 명소 ‘만세 절벽(Banzai Cliff)’ 해안도로.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미군 공격에 밀린 일본군과 일반인 1000여 명이 최후의 집단 자결 장소로 택한 곳이다. 다음날 오전 6시에도 숙소인 켄싱턴호텔 앞 해변에서 연습했다. 한국인 참가자들의 컨디션 조절을 위해 박민규 러닝 전문 코치가 마련한 클래스에서 몸을 풀었다.

드디어 3월 8일, 사이판 마라톤의 날이 밝았다. 한낮 기온이 섭씨 30도에 육박하기 때문에 마라톤은 새벽에 뛴다. 풀코스는 오전 4시, 하프코스는 오전 5시, 10km와 5km 코스는 오전 6시에 출발한다. 밤하늘 별빛 아래서 달리다가 해변에서 남태평양의 장대한 일출을 마주하게 되는 특별한 경험을 하는 코스다.

오전 4시에 출발하는 사이판 마라톤 풀코스 출전자들이 출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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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 투, 원! 스타트!”

마이크를 든 사회자의 카운트다운이 끝나자마자 출발했다. 지역 주민인 자원봉사자들이 나눠 주는 물을 마시며 한 2km쯤 달렸을까. 15분 먼저 출발한 10km 코스 참가자 가수 션이 맞은편에서 달려온다. 벌써 반환점을 돌고 결승점을 향해 달려오는 것이다. 엘리트 선수급 몸매를 가진 션은 바람처럼 ’쌩’ 하고 스쳐 지나간다. 대회 후 션하고 이야기를 나눠 보니 “올해 1, 2월만 해도 모두 1000km를 뛰었다. 지난해에는 총 8000km를 뛰었다”고 한다. 그의 첫딸 하음양과 셋째 아들 하율 군도 이날 레이스를 함께했다.

반환점을 막 돌았는데 갑자기 대회 관계자들이 나를 향해 카메라를 들이댄다. 멋진 포즈를 위해 엄지손가락을 올려 따봉을 날려 주었다. 그런데 카메라맨이 “헤이! 유이∼”라고 외치는 게 아닌가. 그러면 그렇지! 순간 뒤돌아보니 유이가 바로 뒤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나도 휴대전화를 열어 급하게 카메라를 켰다. 유이의 뛰는 모습을 담고 싶었지만, 긴다리로 껑충껑충 앞서간다. 그를 따라잡겠다고 무리했다가는, 걷거나 쉬지 않고 5km를 뛰겠다는 목표는 물건너갈 것이 뻔했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나를 앞질러 가더라도 오버페이스는 금물이다. 나만의 스피드를 지키며 고독하게 내 갈길을 가야 한다.

4km 구간이 지나자 슬슬 몸의 에너지가 올라온다. 남은 1km 구간에서 좀 더 힘을 내 속도를 높여 본다. 가라판 사거리에서 만나는 교통경찰들마다 엄지손가락을 올리며 “굿 잡(Good Job)!”하고 응원해 준다.

마이크로비치 결승점이 눈앞에 있다. 마치 우승자인 것처럼 테이프를 끊으며 결승점에 들어왔다. 기록증을 보니 49분16초. 1시간을 목표로 했는데 11분 정도 앞당겼다. 50대 중반에, 24년 만의 장거리 달리기에 성공한 것을 자축했다. 무엇보다 내 몸무게를 두 다리 근육과 무릎이 다치지 않고 잘 버텨 줬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사이판 마라톤 완주 기념 메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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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기 전에는 “심장과 무릎 관절을 조심하라” “제발 무리하지 말라”며 걱정해 주던 사람들 말이 골인하고 나자 달라진다. “5km도 마라톤이냐” “걸어도 그 시간이면 들어오겠다”는 조롱과 비아냥도 적지 않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봤다. 당신은 5km라도 뛰어 본 적이 있느냐고.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오랜 러닝 경력자들은 축하와 응원을 보내 주는데, 아무런 도전도 하지 않는 사람들은 깎아내리기 바쁘니 요상할(?) 따름이다.

2025 사이판 마라톤 출발선에 선 배우 유이(왼쪽)와 가수 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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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배우 유이 씨는 10km를 55분 21초에 통과했다. 10km 여성 부문 연령대 1위라는 좋은 기록이었다. 그는 “푸른 자연 속에서 동이 트는 아침을 맞이하며 달리는 순간이 정말 특별했다. 내 몸이 자연과 하나가 된 기분이었다”고 소감을 전했다.

부부 마라토너인 김자경 이윤정 씨는 아내 이 씨가 먼저 마라톤에 푹 빠져 남편도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10km 마라톤을 잘 뛰었으니 이제 사이판 곳곳을 함께 탐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풀코스를 뛴 30대 남성은 “사이판 마라톤 대회에서 좋은 공인기록을 얻어 4월에 열리는 보스턴국제마라톤에 신청할 수 있게 됐다”고 기뻐했다.

● 마라톤 후 사이판 여행

런트립 마라톤 여행이 좋은 이유는 건강을 위해 달리고 난 후 더욱 홀가분한 마음으로 여행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사이판은 어디든 차를 타고 20분이면 갈 수 있는 작은 섬이라 한나절이면 관광명소를 대부분 구경할 수 있다. 대신 산과 바다, 들판에서 몸으로 즐길 수 있는 스포츠 액티비티가 많다.

사이판의 진주로 불리는 마나가하섬. 터키쉬 블루, 코발트 블루, 에머랄드 그린이 합쳐진 마나가하섬의 푸른 물결 위로 관광객이 패러세일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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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판의 진주’로 불리는 마나가하섬으로 향하는 배에서 보는 사이판 바다 물빛은 코발트블루와 터키쉬블루, 에머랄드그린이 층층이 펼쳐지며 환상적이다. 섬 해변에서는 가시거리가 30m나 될 정도로 맑은 물에서 스노클링 하며 산호와 물고기 떼를 볼 수 있다. 알록달록한 낙하산을 타고 패러세일링을 하면 섬과 바다 위에서 바람과 햇살을 만끽할 수 있다.

사이판 그로토 해저동굴 다이빙. 동굴 출구로 푸르스름한 햇빛이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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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동부 해안에 있는 그로토는 해저동굴 다이빙 명소. 해안 절벽에 석회암 동굴 3개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구명조끼를 입고 스노클링을 하면 물고기는 물론 깊이 15m 넘는 바닥까지 훤히 보인다. 체험 다이빙은 전문강사와 함께 입수하기 때문에 다이빙 자격증이 없어도 할 수 있다. 푸르스름하고 신비스런 햇빛이 쏟아지는 동굴 입구를 배경으로 강사가 찍어주는 수중사진은 인생샷이 된다.

사이판 북부 버드 아일랜드(일명 거북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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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판 골프장은 골퍼들의 로망인 자연 지형을 그대로 활용한 링크스 코스가 많다. 코럴 오션 리조트는 미국 남자 프로골프 PGA 챔피언 래리 넬슨이 해변를 따라 설계한 골프장이다. 바다 너머 티니안 섬이 눈앞에 펼쳐지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사용된 벙커와 동굴 또한 남아 있어 독특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시그니처 홀인 7번 홀과 14번 홀에서 파도치는 바다를 넘겨 절벽 위 그린에 올려 놓는 짜릿함을 맛볼 수 있다.

사이판 섬 남단부 산안토니오 비치에 있는 ‘퍼시픽 아일랜드 클럽(PIC) 리조트’에서는 사이판 최대 규모 워터파크를 즐길 수 있다. 특히 어린이를 위해 영어로 진행하는 키즈아카데미, 현지 학교와 연계한 한 달 살기 프로그램 ‘아카데믹 펀 스쿨링‘도 운영해 가족 단위 여행자가 많이 찾는다.

글·사진 사이판=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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