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지 마시라.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발언이 아니다. 2004년 4월 탄핵심판 중이던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하 경칭 생략)을 놓고 ‘탄핵정국의 헌법적 해법’을 주제로 고려대 언론대학원이 마련한 조찬강연에서 한 말이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2004년 3월 12일 심각한 표정으로 속보를 읽고 있는 사람들. 뒤편 전광판에는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날 종합주가지수가 크게 떨어졌다는 내용이 보인다. 동아일보DB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기억이 가물가물한 독자를 위해 덧붙이자면, 노무현은 그해 2월 창당한 열린우리당을 위해 “열린우리당에 표를 줄 수 있는 길이 있으면 정말 합법적인 모든 걸 다하고 싶다”라고 발언해 공직선거법 위반, 대통령 재신임 국민투표를 제안해 헌법 72조 위반 등으로 탄핵소추 됐다.
● 허영의 탄핵 기각론, 이번에도 맞을까
물론 윤석열에 대해서도 헌법학의 태두 허영은 언급한 바 있다. 특히 “국회 측이 탄핵소추안의 핵심내용인 ‘내란죄’를 공판 과정에서 뺀 것은 기각사유도 될 수 있지만 각하할 수 있는 사유도 될 수 있다”는 발언은 반탄파(탄핵반대파)로선 귀가 번쩍 트일 일이다.
신동아 인터뷰를 하고 있는 허영 경희대 석좌교수. 조영철 신동아 출판사진팀 기자 korea@donga.com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2004년엔 명지대 법대 초빙교수로, 지금은 경희대 석좌교수로 그는 “헌재가 탄핵심판 과정에서 저지른 위법 사례가 10건도 넘는다”고 ‘신동아’ 3월호 인터뷰에서 조목조목 지적했다. “지금까지처럼(2월 10일 현재) 불공정한 심판을 이어나가면 헌재가 내놓는 결과를 국민 다수가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발언은 묵직하고도 엄중하다. 그래서일지 모른다. 헌재의 결론이 예상보다 늦어지는 것이.
“‘위법’ ‘불공정’ 투성이…헌재의 尹 탄핵심판을 탄핵해야”
https://shindonga.donga.com/politics/article/all/13/5446993/1
법률과 거리가 먼 나는 구순(九旬)을 앞둔 교수님을 대단히 존경한다. 하지만 동의하긴 어렵다. 아무리 절차적 정당성이 중요하대도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가 아님에도 군을 동원해 제 국민에 총부리를 들이댄 대통령을 다시 모실 순 없다. 2004년 허영은 분명 옳았다. ‘경고를 붙인 대통령 탄핵 기각’은 그러나 면죄부만 주었을 뿐, 노무현은 더 강해진 화력으로 돌아왔다. 하물며 ‘윤석열-김건희 공동정권’이 그대로 복귀한다면?
● 노무현은 사과하지 않았다
2004년 5월 14일 헌재는 (대통령의) 열린우리당 지지 발언,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결정 폄훼 발언, 재신임 국민투표 발언이 모두 법과 헌법에 위배됐지만 “파면할 정도의 중대한 법 위반으로 볼 수 없다”며 심리 2개월 만에 기각 결정을 내렸다.
22004년 5월 14일 헌법재판소가 대통령탄핵소추안을 기각한 직후 대통령직에 복귀한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열린 만찬에서 밝은 표정으로 고건 당시 국무총리와 환담하는 모습. 동아일보DB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그러면서도 헌재는 “헌법에 의해 권한과 권위를 부여받은 대통령이 헌법을 경시하는 것은 스스로를 부정하고 파괴하는 것”이라며 “대통령 스스로 헌법과 법률을 준수함은 물론 위헌 위법 행위에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경고를 빼놓지 않았다. 소수의견을 공개하진 않았으나 6(기각 또는 각하) 대 3(인용)으로 대통령직을 지킨 것으로 알려졌다.
● “탄핵이전으로 돌아간 듯” 여당도 걱정
두 주일 만에 동아일보엔 ‘변함없는 노… 야 “역시나”…여 “어쩌나”’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연세대 특강에서 “보수는 힘센 사람이 맘대로 하는 것” “보수는 바꾸지 말자는 것”이라며 또 설화를 일으킨 거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 기각 이후 연세대 특강에서 한 발언을 두고 나온 여야 반응을 보도한 동아일보 2004년 5월 29알자 기사.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한나라당(현재 국민의힘) 대표 박근혜는 “어떻게 국민통합을 하려는지 정말 걱정”이라며 혀를 찼다. 열린우리당 당선자 중 상당수도 “대통령이 탄핵 이전으로 돌아간 것 아니냐”고 했다. 탄핵 기각 직후 52.4%였던 지지율이 넉 달 만에 30%대로 곤두박질쳤다. 재임 2년 반을 넘기면서는 퇴임 때까지 한번도 30%를 넘지 못했다(갤럽).
● 박근혜 지금도 “헌재 결정문 납득 못해”
탄핵이 인용됐다고 사람이 달라지지도 않는다. 박근혜는 2017년 3월 10일 헌정 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에서 파면됐다. 헌재는 “피청구인이 최순실 씨의 사익을 위해 대통령의 지위와 권한을 남용하고도 잘못을 숨기고 수사에 불응한 것은 헌법 수호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는 중대한 법 위배 행위”라며 “이에 재판관 전원(8명)의 일치된 의견으로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고 밝혔다.
대통령직에서 파면된 후 구속수감 중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이동하는 박근혜 전 대통령. 왼쪽 옷깃에 달린 배지에 수인번호 ‘503’이 적혀 있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승복 메시지는 없었다. 이틀 후 사저로 돌아가면서도 박근혜는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믿고 있다”고 했을 뿐이다. 작년 봄에 낸 회고록에도 “최(서원) 원장에게 어떤 이익을 줄 목적으로 대통령의 지위와 권한을 남용한 적은 결코 없다”며 “헌재 결정문은 납득할 수가 없었다”고 썼다. 심지어 “먼 훗날에 역사가 탄핵의 정당성에 대해 평가해줄 것이라고 믿는다”고 주장했다. 단지 속았을 뿐, 몰랐을 뿐, 사인(私人)에게 국정농단을 허용한 잘못은 죽어도 없다는 얘기다.
●‘적폐청산의 칼’에 무너진 문재인
탄핵이 기각되든, 인용되든, 전현직 대통령들만 안 변하는 게 아니다. 대선주자도, 즉 탄핵이 인용됨으로써 대선주자에서 대통령이 된 사람 또한 징하게 안 변한다.
2017년 대선주자 선두였던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 문재인은 줄곧 ‘적폐청산’을 강조했다. 헌재 결정 이틀 뒤 첫 기자회견에서도 “적폐를 확실히 청산하면서 민주주의 틀 안에서 소수의견도 존중하는, 원칙 있는 통합이 중요하다”고 했다. 물론 집권하면 ‘대탕평 내각’을 구성하겠다고 했고,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되자 잠깐은 ‘통합’을 내세우기도 했다. 그래도 대선 공약집에 기록된 제1공약은 역시 적폐청산특별조사위원회 설치였다.
제 19대 대통령선거를 하루 앞둔 2017년 5월 8일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서울 광화문에서 마지막 유세를 하고 있다. 동아일보DB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2017년 5월 10일 이날은 진정한 국민 통합이 시작된 날로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취임사의 이 약속은 뻥이었다. 문재인이 세운 ‘윤석열 검찰’은 박근혜-이명박 두 전직 대통령에 이어 전직 대법원장까지 잡아넣으며 ‘정권의 칼’로 줄기차게 적폐청산을 해댔다. 집권 2주년 청와대로 초청된 사회원로들이 탕평과 통합을 건의하자 문재인은 칼같이 말했을 정도다. “(국정농단과 사법농단의) 진상을 규명하고 청산이 이뤄진 다음, 그 성찰 위에 새로운 나라”라고.
적폐청산용으로 시퍼렇게 날을 벼린 윤석열 검찰은 그러나 멈출 수 없는 권력이었다. 칼끝이 ‘살권수(살아있는 권력 수사)’로, 법무부 장관 조국으로, 청와대로 향하면서 마침내 윤석열 자신이 야당 대선 후보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은…탄핵심판대에 선 두 번 째 보수정당 대통령 신세다.
● 인간은 어리석은 판단을 멈추지 않는다
윤석열 역시 입때껏 승복 메시지를 내지 않았다. 최후진술에서 탄핵이 기각될 경우, 임기 단축 개헌 추진 의사를 밝혔을 뿐이다. 그러나 설령 대통령직에 복귀해 개헌안을 내놓은들, 그가 ‘반국가세력’ ‘내란 공작 세력’이라고 폄훼한 거대야당이 그 개헌안에 동의할 지 의문이다. 그보다는, 당장은 탄핵만 기각(또는 각하)되면 뭐든지 할 듯싶지만, 막상 그렇게 된다면 그 좋은 대통령 자리를 스스로(특히 김건희가) 임기 전에 내려올 것 같지가 않다.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달 8일 법원이 구속 취소를 결정한 직후 서울구치소를 나오면서 지지자들을 향해 주먹을 쥐어보이는 윤석열 대통령과 사흘 후인 11일 ‘대장동 개발비리 의혹’ 공판에 출석해 기자들의 질문을 받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전영한·장승윤 기자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대선주자 중 선두인 민주당 대표 이재명도 다르지 않다. 신년 기자회견에서 그는 “정치 보복은 절대 안 된다”고 했다. “내란 세력도 사면할 것이냐는 얘기가 벌써 나오는데, 그것은 부(不)정의”라는 말엔 동의한다. 그러나 2023년 9월 자신의 체포동의안 가결파를 색출해 책임을 묻기 위해 일부러 “부결시켜 달라”고 했다는 데는 소름이 돋는다. 비명계도 용납 못하는 당 대표가 대통령이 될 경우 전임 정권 ‘부역자들’을, 반대파와 적인(敵人)들을 그냥 둘 것 같지가 않다. 물론 이재명 역시 통합을 약속할 것이다. 그의 말이든, 공약이든, 믿는 사람이 바보라고 본다.
시대를 통틀어 영원하고도 궁극적인 정치적 문제는 ‘통제를 행하는 자들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였다. 생물학자 제임스 웰스의 ‘인간은 어리석은 판단을 멈추지 않는다’에 나오는 말이다. 그래도 그렇지, 21세기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가 넘는 우리나라에서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 대통령이 다시 돌아와 똑같은 ‘통치’를 할까 봐 두려울 줄은 정말 몰랐다. 럭키비키 그 대통령이 파면된대도 나라를 ‘일극체제’ ‘전체주의’로 만들 유력 대선주자 때문에 공포스러울 줄은 진정 난 몰랐다.
김순덕 칼럼니스트
ⓒ 동아일보 & donga.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