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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2 (토)

원주민 병사 있다고... 美국방부 홈피, 2차 대전 상징 ‘이오지마 사진’ 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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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정부의 ‘다양성 지우기’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도 있는 법. 미국 사회에서 ‘다양성’과 ‘정치적 올바름’이 시대정신으로 떠오른 뒤 한편에서는 이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분위기에 대한 피로감도 번지고 있다. 고전 반열에 오른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원작 뼈대만 남긴 채 ‘올바르게’ 바꿔버린 새 작품이 논란 끝에 공개됐다. 같은 날 정부 기관 웹사이트에서는 오랫동안 역사적 장면으로 기억돼 온 전쟁 기념물이 ‘소수자’와 관련됐다는 이유로 사라졌다.

제2차세계대전의 격전지 이오지마에서 성조기를 게양하는 미군의 모습.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5년 2월 23일에 AP사진기자 조 로즌솔이 촬영한 사진으로 1945년 퓰리처상 사진 부문을 수상했다./위키미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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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국방부가 제2차 세계대전 승리의 상징과도 같은 ‘이오지마의 성조기’ 사진을 웹사이트에서 최근 삭제했다. 태평양전쟁 최대 격전지였던 이오지마 스리바치산 정상에 미 해병대원들이 성조기를 세우는 장면을 담은 사진인데, 대원 중에 아메리카 원주민 출신 병사가 있다는 점이 삭제 배경으로 지목된다.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DEI(다양성·형평성·포용성) 정책 척결에 나선 가운데 ‘미 해병대 역사상 가장 야만적이고도 고귀한 전쟁’으로 불리는 이오지마 전투의 역사 기록까지 삭제된 것이다.

19일 워싱턴포스트·아사히신문 등에 따르면 미 국방부 웹사이트에서 ‘이오지마의 성조기’ 사진이 사라지고, 사진에 등장하는 해병대원 여섯 명 중 하나인 아이라 해밀턴 헤이스를 소개하는 내용과 그의 사진도 함께 삭제됐다. 원주민 출신인 헤이스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아버지의 깃발’을 비롯해 여러 영화·저작에서 조명받았던 인물이다.

워싱턴포스트는 “사진을 삭제한 이유는 원주민 출신 해병대원이 포함됐기 때문으로 보인다”며 “미국 국방부는 현재 DEI 정책을 연상시키는 사진을 웹사이트에서 삭제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라고 보도했다.

AP 종군기자 조 로즌솔이 찍은 이 사진은 1945년 퓰리처상 사진 부문을 수상했다. 1775년 해병대 창설 이후 국가를 위해 희생한 모든 대원을 기리는 버지니아주 알링턴 소재 ‘해병대 전쟁 기념비’가 사진 속 병사들의 모습 그대로 조성됐을 만큼 미국 해병대가 자랑스러워하는 사진이다.

이오지마는 일본 본토에서 남쪽으로 약 1250㎞ 떨어진 화산섬이다. 1945년 2월 19일 이 섬에 상륙한 미 해병대는 3월 26일 섬을 완전 탈환할 때까지 6800여 명의 전사자를 냈다. ‘옥쇄’를 감행한 일본군은 수비 병력 2만933명 가운데 약 1만9900명이 전사·행방불명됐다.

반(反)DEI 바람 속에 미 국방부는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B29 폭격기 ‘이놀라 게이(Enola Gay)’의 사진도 삭제 후보로 지정한 상태다. ‘게이’라는 단어가 남성 동성애자를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 명칭은 당시 조종사였던 폴 티베츠 대령이 모친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일본 교도통신은 “DEI 정책을 지우려는 과정에서 귀중한 전쟁 기록이 사라지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월 취임과 함께 연방 정부 기관의 DEI 프로그램을 모두 폐지했고, 취임 후 50일 동안 총 15개의 DEI 관련 행정명령을 발동했다. 미국 역사상 두 번째 흑인 합참의장인 찰스 브라운 장군을 전격 경질했고, 미국 최초 여성 해군참모총장인 리사 프란체티 제독을 포함한 군 수뇌 다섯 명에 대한 교체도 지시했다. 미군에서 인종·성별에 따라 소수자를 배려하는 정책도 모두 없앴다. 현역 복무 중인 1만4000여 명의 성전환 군인에 대한 강제 전역과 추후 입대 금지도 추진하고 있다.

[도쿄=성호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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