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3.17 (월)

오랜 ‘동행’이라는 위로 [양희은의 어떤 날]

0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이십대 청년이 먼저 읽고 그리다. 김예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겨레

양희은 | 가수



올 휴가는 중앙아시아 실크로드 쪽으로 가볼까 했지만, 이제 무릎도 시원찮고 일주일 넘는 여행은 무리라는 남편 말에 꿈만 꾸다 말았다. 18살짜리 노견 미미와 7살 초코를 맡아줄 곳이 없어서 어디든 훌쩍 떠날 수가 없다.



1981년 배낭여행 할 때 스페인 세비야에서 만난 할아버지 얘기가 기억난다. 자기는 이혼했고 아이들 역시 다 결혼시켜 홀가분한데, 유일하게 다섯살배기 푸들이 뒷목을 잡아끄니 그 아이 떠난 뒤라야 스페인에 와서 꿈에 그리던 플라멩코 기타를 배울 수 있겠다고 했다. 서울의 어떤 친구는 개훈련 학교에 셰퍼드를 입학시키고 주말마다 고기랑 달걀을 사 들고 가서 개 훈련사에게도 인사 여쭙는데 듣자 하니 학비가 상당했다. 그 돈이면 차라리 아이 하나 공부시키고도 남겠다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단적으로 마침표 찍을 얘기는 아니다. 사람마다 마음에 두는 일이 다를 테니….



개 기르는 이들의 얘기는 끝도 없다. 자기네 치와와는 노래도 하고 심지어 껌까지 씹는데 단물 빼먹고 나면 ‘퉤!’ 하고 뱉는단다. 재주 부리는 얘기야 많지만 껌 씹다 뱉는 개는 자기네 개뿐일 거란다. 또 어떤 집 개 이름은 와사비인데, 일본 겨자만 보면 눈이 뒤집혀서 달려들어 먹겠다고 환장을 하기 때문이란다.



봄 기운이 돌자 사람들마다 개 데리고 산책을 나온다. 우리나라 애견인구도 많이 늘었다. 반려동물 양육 가구가 600만가구가 넘고 반려인은 그 두배가 넘는데 고양이보다 개가 2~3배 많다고 알고 있다. 반려동물 수가 느는 만큼 우리 가슴에 외로움도 커지는 걸까? 개만도 못하다는 건 욕이 아니다. 개만큼만 해보라지. 그 충성심, 되돌려 받는 사랑, 애당초 배신할 줄 모르는 마음.



하지만 무지개다리 건너가는 아이들과의 이별은 가슴 속을 시큰하게 한다. 울 엄마는 늘 노래처럼 “미미야, 내가 먼저 가든지 네가 먼저 가든지 할 텐데…. 나 먼저 가거들랑 넌 좀 있다 따라 와라” 하셨다. 미미는 극진한 보살핌을 받고 있지만 심장과 신장까지 안 좋아지니까 주 3회 수액을 맞는다. 7㎏에서 4.7㎏까지 체중이 줄었다. 헌 섬에 곡식이 더 든다고, 밥을 잘 먹는데도 왜 살로 가지 않을까? 참 이상하다. 물도 잘 마시는데…. 사람이나 동물이나 나이 든다는 건 피할 도리가 없지만, 늙는다는 게 이렇게 슬프고 아프고 안쓰러운지 참….



나는 방송국에 출근해서 매일 아침 9시5분부터 11시까지 일주일 내내 청취자들과 소통한다. 엠비시(MBC) 라디오 미니를 내려받으면 세계 어디서나 들을 수 있다. 1975년 ‘여성의 날’을 계기로 시작된 ‘여성시대’는 올해로 50주년을 맞았고, 나는 1999년부터 26년째 진행을 하고 있다. 편지 보낸 답례로 주던 선물도 설탕, 소시지, 양말이었다가 세월 좋아지면서 냉장고, 텔레비전 등으로 푸짐해졌다.



인상 깊었던 코너도 많았는데, 그중 자녀들과 본인들 요청으로 5~6년 동안 제주도에서 100쌍의 늦깎이 결혼식을 올려 드리면서 심지어 전세기까지 띄워 드레스와 예복, 화장, 기념사진을 통틀어 해 드렸다. ‘미·고·사 운동’이라고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마음을 표현하는 캠페인도 열었다.



3월 들어서는 1979년부터 이어온 한결 같은 봄맞이 축제 ‘신춘편지 쇼’가 시작되어 애청자들의 글을 기다린다. 신춘문예 못잖은 열기로 한결같이 가슴으로 쓰는 사연들이 도착하고 있다. 올해의 글제는 ‘함께’와 ‘새로운’ 두가지다. 50주년 기념으로 특별대상 상금이 천만원으로 책정되어 사람들의 도전하고픈 의욕을 부추길까?



26년 동안 여러가지 특별기획이 있었지만 ‘주부 나들이’ 중 결혼 이주 여성들과의 동행으로 그네들의 시어머니, 시누이, 올케, 동서, 한글학교 선생님과 함께한 ‘1+1 행사’도 손에 꼽는다. 아마도 참가자들 역시 그 나들이의 추억을 깊이 간직할 듯 싶다.



가수로서 특정 방송 진행을 오래 한다는 건 본인의 노래가 골고루 전파를 타기 힘들다는 제한을 갖는다. 청취율 경쟁사의 적군(?)이라서. 실제로 나에게 그렇게 말한 프로듀서도 있었다. 심지어 아침 생방송 프로그램을 오래 한다는 건 많은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공연기획사에 아침 방송 때문에 콘서트 힘들다고 거절했을 정도.)



중1 때 아버지가 사주신 빨간 트랜지스터로 시작된 라디오 사랑이 지금까지 이어진 덕에 규칙적인 일상을 벗어나지 않았고, 늘 집밥을 고집한 게 건강을 지키는 좋은 생활습관이 된 건 고마운 일이다. 40대 끝자락에 시작한 ‘여성시대’가 70대 중반까지 인생에 큰 스승이 되었고, 고향을 떠나거나 어디에서 어떻게 일하며 살았든 간에 라디오를 켰을 때 아직도 그 사람이 그 자리에 있네,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는 안도감에 보탬이 되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한겨레는 함께 민주주의를 지키겠습니다 [한겨레후원]

▶▶실시간 뉴스, ‘한겨레 텔레그램 뉴스봇’과 함께!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