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늑약 체결 이틀 전 이뤄진 고종과 이토의 ‘최종협상’
고종(왼쪽) 황제와 이토 히로부미. /조선일보 DB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을사년(乙巳年)을 맞아 ‘밝고 희망찬 을사년’ 운운하는 기분이 좀처럼 들지 않고 매우 을씨년스럽다는 기분이 드는 것은, 매일 나오는 메인뉴스가 마치 수요동물원을 보는 듯한 작금의 한심한 정치적 상황에도 기인하겠습니다만, ‘을사년’이란 60간지의 그 이름이 주는 참혹한 느낌이 큰 요인을 차지할 것입니다. 이 망할 을사년에, 1905년 11월 대한제국이 일제에 외교권을 빼앗겼던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어떻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덕수궁 담장 바깥에 있는 중명전에서 강제와 협박으로 체결된 그 조약에 대해 지금껏 우리는 당연히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고종 황제는 조약 체결에 반대했다. 그런데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의 을사오적(乙巳五賊)이 조약 찬성 의사를 밝혔다.’
고종은 찬성 의사를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조약 문서에는 고종의 국새 대신 외부대신 박제순의 도장만 찍혔지만, 일각에서는 “고종이 당시 군주로서 목숨을 걸고 조약 체결을 막았어야 마땅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비판합니다. 당시에도 면암 최익현 같은 선비는 그와 같이 주장했었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고종의 의사와 어긋나게 을사오적이 일제와 협력해 조약을 맺었다’는 것은 사실일까요? 최근 이 점에 대해 고개를 갸웃거릴 만한 자료가 눈에 띄었습니다. 정치학자인 한상일 국민대 명예교수의 연구서 ‘고종과 이토 히로부미: 망국의 길목에서, 1904-1907′(기파랑)입니다.
한 교수가 이 책에서 인용한 주요 자료는 1904년부터 1907년 사이에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고종을 알현한 일본 측 기록입니다. 이토는 1905년 11월 15일 오후 3시 중명전에서 고종을 알현했습니다. 당시 경운궁(현 덕수궁)의 화재로 인해 고종은 지금은 덕수궁 담장 밖에 있는 서양식 건물인 중명전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이 내용은 ‘고종실록’을 비롯한 한국 측 기록에 전혀 나오지 않는데, 최소한 황제인 고종이 그 대화를 기록하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의례적인 인사가 끝난 뒤 고종은 이토에게 을미사변 이야기를 꺼내 일본의 책임을 넌지시 지적한 뒤 ‘1904년 한일의정서 이후 시정개선이란 이름으로 취한 일본 측의 조치가 오히려 조선인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항변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을사늑약을 미리 방어하는 듯한 말을 합니다.
“최근에 이르러서는 외교 관계를 일본이 인수한다는 소문이 전해지면서 인심은 한층 더 흉흉해지고 일본의 진의를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상황에 이르렀소. 이러한 실상은 모두 일본의 태도를 의심하게 하고 일본에 대한 악감정을 일으키게 하고 있소.”
여기까지 본다면, 아, 고종은 일제의 침략에 저항한 영명한 군주였구나, 이렇게 잘못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토는 돌연 태도를 바꿔 무례한 어조로 고종에 대해 반박합니다.
“폐하의 여러 가지 불만스러운 말씀의 취지는 잘 알겠으나, 제가 하나만 묻겠습니다. 한국은 어떻게 해서 오늘까지 생존할 수 있었습니까? 또 지금의 한국 독립은 누구 덕택입니까? 폐하는 이러한 사정을 아시면서도 그런 불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여기서 ‘그건 독립을 지켜준 게 아니라 너희가 우리를 침략한 거잖아’라는 당연한 말을 고종은 꺼내지 않습니다. 그저 “독립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일본의 힘이었고, 특히 경이 많이 애쓴 결과”라며 구차하게 말할 뿐이었습니다. 고종은 아관파천에 대해서도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이토는 말을 끊고 자신이 한국에 온 본론을 꺼냅니다.
“천황의 지시에 따라 (일본) 정부가 확정한 방안은 귀국의 대외 관계, 소위 외교를 귀국 정부로부터 위임 받아 일본 정부가 이를 대신하는 것입니다. 내정, 즉 자치의 요건은 여전히 폐하 친정 아래서 폐하의 정부가 주관하기 때문에 종전과 조금도 다른 바 없습니다.”
이게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은 1907년 정미조약 이후의 침략 과정에서 곧 밝혀지게 될 것입니다만, 이토는 동양 화란의 뿌리 제거,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 유지, 국민 행복 증진이라는 사탕발림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고종은 ‘외교권만은 절대 넘겨줄 수 없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 아니라 일종의 협상을 시도합니다.
고종: 귀국 황제 폐하가 우리나라에 대해 한결같이 마음 쓰며 걱정하는 생각에 깊이 감사하고 있소, 그래서 대외관계 위임에 관한 문제를 절대로 거부할 뜻은 없소. 원하는 바는, 다만 그 형식을 남겨두고 내용에서는 어떠한 협정이라도 결단코 이의가 없소.
이토: 형식이란 어떤 의미입니까?
고종: 사신 왕래와 같은 것이오.
실제로는 일본이 한국의 외교 주권을 전적으로 행사하지만, 다른 나라에 외교사절단을 파견하거나 타국의 외교관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일은 한국에 남겨달라는 것입니다. 외교의 ‘형식’만이라도 독립국의 형태를 유지하게 해 달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토는 이것을 거부했습니다.
“무릇 외교에는 형식과 내용을 구별할 수 없습니다. 한국이 외교에서 여전히 현상을 유지하려 든다면 영토에 관한 국제관계 등 여러 가지 복잡한 분쟁의 단서를 만들어 다시 동양 화란의 원인을 제공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극히 위험하고 우리나라가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어 이토는 한국 외교권 박탈의 결정에 대해 “확고하고 전혀 변경할 수 없는” 최종안임을 일방적으로 통고했습니다. 이어 휴대한 협정 초안의 사본을 고종이 읽어보게 했습니다. 그걸 읽은 고종은 형식조차 남지 안흔다면 한국은 결국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관계”와 같고, 또는 가장 열등한 나라, “예를 들면 열강이 아프리카를 대하는 것과 같은 지위”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했습니다. 고종이 이런 정도의 기본적인 국제 정세에 대한 인식은 있었다는 것이 흥미롭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토는 또 사탕발림을 늘어놓습니다. “히로부미는 폐하의 특별한 대우를 욕되게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귀국의 황실과 국가를 위해서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이지, 폐하를 기만해 오직 일본만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불과 5년 안에 이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음이 드러납니다. 이토가 1909년 안중근에게 저격당한 이후에 일본의 정책이 바뀐 것도 아니었고, 이토 생전에 이미 한국 강제 병합을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이토는 “조약을 체결하더라도 한·일 두 나라에는 각각의 군주가 있고 독립을 유지하는 것이다” “헝가리에는 황제가 없고 아프리카에는 독립국이 없다”며 이를 한일관계에 비교하는 것은 “지나친 망상”이라고 했습니다. 고종은 “내가 내 신하들보다 당신에게 더 의존하지 않았느냐”는 인간적인 호소를 하며 외교권의 형식만이라도 존속하게 해 달라고 했으나 이토는 아예 협박으로 나왔습니다.
이토: 이를 수락하든 거부하든 폐하의 자유지만, 거부한다 해도 제국 정부는 이미 결심이 섰습니다. 다만 거부하면 귀국의 지위는 조약을 체결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상황에 부딪치게 될 것이고, 한층 더 불리한 결과를 각오해야만 할 것입니다.
고종: 이는 중대한 일이니 지금 짐 혼자 결정할 수 없소. 정부 신료와 논의하고 또 일반 인민의 의향도 살펴볼 필요가 있소.
그러자 이토는 “헌법정치가 이뤄지는 게 아니라 전제군주국인 귀국에서 무슨 인민의 의향을 살핀단 말이냐”고 반박합니다. “이는 인민을 선동해 일본의 제안에 반항하려는 것으로 여겨진다”고까지 말했습니다. 4시간 넘게 이어진 고종과 이토의 대화는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이토: 폐하께서는 오늘 밤 즉시 외부대신을 불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공사의 제안을 기초로 협의해 속히 조인이 이뤄져야 한다는 뜻의 칙명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고종: 어쨌든 외부대신에게 교섭과 타협에 힘쓰라는 뜻을 전하겠소.
이토; 거듭 말씀드렸다시피 본안의 결정은 결코 지연될 수 없습니다. 신속한 결정이 필요합니다. 담당 외부대신은 물론 정부 대신에게도 그 뜻과 방향을 알려 신속한 타협이 이뤄질 수 있도록 칙명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내일 하야시 공사가 외부당국으로부터 아직 폐하의 지시를 받지 못했다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확실히 약속해주시기 바랍니다.
고종: 속히 그리 조치하겠소.
이토: 그러면 히로부미는 물러가 결과를 기다리겠습니다. 그 결과에 따라 다시 입궐하겠습니다.
고종: 짐은 경을 깊이 신뢰하오. 짐의 희망을 경이 귀 황실과 정부에 전달해준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겠소.
이토: 그 희망은 전혀 이뤄질 가능성이 없으니 단념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①서울 중구 정동길의 덕수궁 중명전 모습. 1905년 11월 17일 이곳에서 강제로 을사늑약이 맺어졌고, 그보다 이틀 전 고종과 이토 히로부미 사이의 '협상'이 이뤄진 곳이기도 하다. ②고종 황제. ③일본의 이토 히로부미. ④을사늑약 문서. ⑤왼쪽부터 당시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으로 이들을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고 부른다. /박상훈 기자·위키피디아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이토가 중명전을 나올 때는 1905년 11월 15일 오후 7시였습니다. 다음날인 16일부터 일본 측은 한국 대신들을 회유, 강압, 협박하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고, 18일 새벽 1시 을사늑약 체결이 완료됐습니다. 그러나 보통 이 시점을 ‘17일 밤’으로 여겨 ‘11월 17일’을 을사늑약이 이뤄진 날로 봅니다. 이 상황에서, 과연 신하들은 황제의 뜻과 다르게 일본과 조약 체결을 했던 것이었을까요? 한상일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을사조약 당시 고종이 이의를 제기한 것은, 이미 조약 체결을 기정사실화한 뒤 신하들에게 문구 수위 조절을 지시한 것에 불과하다고 봐야 한다.”
조약 체결 뒤인 11월 28일, 이토는 귀국 인사차 고종을 다시 알현했습니다. 그 사이에 이토에겐 ‘하얼빈 의거의 서막’과도 같은 일이 발생합니다. 수원 팔달산에서 사냥을 한 뒤 열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서릿재(지금의 안양 석수동)에서 23세 청년 원태우가 던진 돌 때문에 열차 창문이 깨져 유리 파편이 얼굴에 박히는 전치 1주의 부상을 입었던 것입니다.
고종은 “폭한으로부터 상처를 입었다고 들었는데 다행히 가볍다고 해 안심했다”는 덕담을 건넸습니다. 그러고 나서 “한국은 바야흐로 유신을 도모해야 할 시기에 이르렀고, 한국 중흥의 대업인 모든 개혁의 성사는 당신의 지도와 가르침에 달렸다”고 강조한 뒤 “당분간 한국에 머무르면서 나와 정부를 도와 개혁의 선후책을 이끌어 달라”고 당부했습니다. 외교권을 빼앗은 자를 오히려 붙잡는다?
뭔가 속셈이 있었던 것 같아 보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고종은 ‘개혁 주제 5항목’을 이토에게 제시합니다.
① 금융을 원만히 정비해 경제계의 핍박 구제.
② 교육방침을 정하고 황족과 국민의 지식 계발.
③ 징병제 군대를 시행하고 철저한 훈련을 통한 국방 완비.
④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의 구별과 책임의 소재를 확실히 함.
⑤ 궁중의 재정을 정리하고 황실 재산 증대.
이게 갑자기 무슨 제안인가 의아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특정 부분에 밑줄을 친다면 이 내용이 다시 보일 것입니다.
① 금융을 원만히 정비해 경제계의 핍박 구제.
② 교육방침을 정하고 황족과 국민의 지식 계발.
③ 징병제 군대를 시행하고 철저한 훈련을 통한 국방 완비.
④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의 구별과 책임의 소재를 확실히 함.
⑤ 궁중의 재정을 정리하고 황실 재산 증대.
......외교권을 넘겨준 데 대한 ‘보상’을 요구한 것이라고 보면 지나친 해석일까요?
설사 고종이 이미 ‘외교권 박탈은 받아들이고 다만 문구만 수정하라’는 을사늑약의 가이드라인을 정해 놓았다 하더라도 을사오적의 죄가 가벼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을사늑약 소식을 듣고 통분해 자결한 전국의 여러 지사들과, 봉기한 숱한 의병들과, 을사늑약으로 입은 핍박을 호소하기 위해 만리타국 사지(死地)를 찾아간 헤이그 특사들이 을사늑약 전후의 사정을 알았더라면, 그들에겐 과연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자질이 불량한 정치 지도자가 대단히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사실만큼은, 고금이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 뉴스레터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179194
[유석재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