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2024년 3월1일 서울 중구 유관순 기념관에서 열린 삼일절 기념식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
박노자 |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학교에서 한국사와 세계사를 따로따로 배워서 그러는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한국사와 세계사를 종종 별도의 영역처럼 취급한다. 한데 사실 한국의 현대사만큼 세계사적 맥락과 직결돼 있는 한 나라의 역사도 없다. 가령, 군사 독재는 한국뿐만 아니라 한국처럼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의 변두리에 위치했던 1960~1980년대 남미 국가들의 현실이기도 했다. 1980년대 말의 민주화를, 한국과 대만, 동유럽과 남미,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이 공유했다. 1990년대 말 이후의 신자유주의의 도입과 비정규직 양산 등에 있어서는, 한국과 일본은 대체로 비슷한 궤도를 밟아왔다. 즉, 한국 현대사는 기본적으로 ‘특수’라기보다는 ‘보편’에 훨씬 더 가깝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
국내외에 엄청난 충격을 던진 이번 윤석열 내란 사태 역시 그렇다. 이 사태에서는 한국 특유의 상황, 예컨대 검사 출신 대통령의 안하무인식 권위주의적 사고·행동, 그리고 군사 조직에 대한 시민 사회 감시·통제의 부족 등도 반영됐지만, 동시에 이 내란은 세계적 트렌드의 일부이기도 하다. 사실, 2010년대 후반부터 우향우와 극우들의 약진, 극우파의 권력 장악과 신권위주의 정권의 성립은 전세계의 하나의 지배적 경향이 됐다. 취임 이후 윤의 극우 정책과 궁극적 내란 시도는 바로 이 경향에 속하는 것이다.
2010년대 후반 이전에는 신권위주의는 대체로 지정학적 비중이 있는 준주변부 국가들의 몫이었다. 2000년대 초부터 권력 기반을 굳힌 푸틴 정권은 가장 전형적이었지만, 2014년부터 출발한 튀르키예의 에르도안 정권과 인도의 모디 정권도 비슷한 부류에 속했다. 한데 2016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의 승리와 트럼프 1기 정권(2017~2021년) 이후로는 상황이 본질적으로 바뀌었다. 그때부터는 한국이 속하는 국가의 그룹, 즉 의회 민주주의가 정착된 고소득 국가에서도 신권위주의 정권의 수립을 기대하는 극우 정치가 유행처럼 번진 것이다. 이런 국제적 배경이 없었다면 이번 윤석열의 망동이 일어났을 확률도 더 낮았을 것이다.
내가 사는 스칸디나비아가 “사회민주주의 본산”으로 일컬어졌던 시대는 이제 옛날이 됐다. 오늘날 스웨덴의 우파 내각은 2022년 총선에서 20%의 득표력을 보인 극우 정당 ‘스웨덴민주당’의 지지에 의존하는가 하면, 2023년 총선에서 역시 20% 정도의 득표를 한 핀란드의 극우 정당 ‘핀인당’은 지금 핀란드 연립 우파 내각에서 핵심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한때 유럽 좌파의 “마음의 고향”이었던 스칸디나비아만 그런 것도 아니다. 유럽연합의 주요 국가인 이탈리아에서 극우파가 이미 권력을 장악했는가 하면,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각각 20%대와 30%의 지지를 받는다. 트럼프 2기를 준비하는 미국을 비롯하여, 세계체제의 준주변부에 이어 중심부도 이젠 우향우를 거듭하고 있다.
왜 극우파는 구미권에서 상당 부분의 민심을 얻을 수 있는가?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낳은 모순들이 가져다준 결과다. 1980년대 이후의 세계화는 구미권에서 시작됐지만, 그 최고의 수혜자는 이제 전세계 제조업 생산의 무려 3분의 1을 담당하는 중국 등 신흥국들이 됐다. 1973년부터 1990년대 초까지 계속 내려갔던 이윤율은 신자유주의 도입으로 1991~2007년 사이에 반등했다가는,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로는 계속 내림세로 일관했다. 구미권에서는 양적 완화, 즉 추가 통화 발행과 공적 자금 투입으로 세계 금융 위기를 부랴부랴 수습했다가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지속적인 생활 수준의 저하, 대중들의 빈곤화 문제에 직면했다. 스스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결과로 가난해졌다고 여기는 유권자들이 보호주의 정책을 집행할 수 있는 ‘강한 국가’를 열망하게 됐는데, 이런 요구에는 여태까지 세계화를 잘 반대하지 못했던 제도권 좌파보다 극우 정당들이 더 적합한 것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이상으로 세계화에 더 회의적인 구미권의 대중들과 달리, 무역으로 먹고사는 이상 세계화를 반대할 리가 없는 한국에서는 세계화가 아닌 복지국가의 미발달과 국가 민생 정책의 부재야말로 핵심적 문제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오로지 복지 지출 삭감만으로 일관했던 윤석열로 대표되는 한국형 극우들은, 유권자들에게 제시할 수 있는 매력적 의제는 아예 없다. 페미니즘 마녀사냥을 통한 남녀 갈라치기와 젊은 남성 표심 장악의 시도부터 대북 전쟁 도발을 위해 평양에 무인기를 보내는 폭거까지, 그들이 구사할 수 있는 전략이란 오로지 혐오와 공포, 군사적 폭력밖에 없는 것이다. 한데 그래 봐야 내란을 성공시킬 수 있는 만큼의 대중적 지지를, 한국 극우들이 전혀 확보하지 못했다.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종합해보면 지금 한국인 10명 중의 7명이 윤석열의 탄핵(파면)을 지지한다. 이대로 가면 가까운 미래에 온건 자유주의자들의 집권이 거의 확실시된다.
사실, 이렇게 되면 한국은 전세계적 우향우의 경향에 ‘역류’하는 셈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돼도 안심은 금물이다. 마찬가지로 글로벌 우향우의 경향을 거슬러 갔던 지난번의 문재인 정권은, 비정규직이나 집값 폭등 등 신자유주의가 낳은 문제들의 해결에 실패해 결국 극우들에게 자리를 내주게 됐다. 다음에 들어설 온건 자유주의 정권이 문 정권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온건 자유주의 정치인에 대한 거리로부터의, 왼쪽으로부터의 강력한 압박이 필수적이다. 검찰 개혁과 함께 비정규직 고용 사유의 제한 등 고용의 전반적 정규직화와 부유층 과세의 대대적 강화, 그리고 노후연금의 내실화 등 보편적인 복지제도의 완성을 강력히 요구해야 의회와 관료기구에서의 보수들의 저항을 뚫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압력이 실효를 거두자면, 민주당보다 왼쪽에 있는 진보 정당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힘을 키워야 하고, 복지나 남북한 대화와 한반도 평화 체제 정착 등 서로 합의할 수 있는 의제에 대해서는 서로의 이념적 차이를 넘어 손잡고 같이 투쟁할 줄 알아야 한다. 강력한 급진 진보 정치 없이는 우리는 전세계적 극우화의 파도를 오랫동안 막아낼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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