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태서 성균관대 교수가 지난해 12월31일 성균관대 연구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박민희 선임기자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트럼프는 미국, 러시아, 중국 등 강대국끼리 세력권을 구축하고 거래하는 세계를 만들려 한다.”
차태서 성균관대 교수는 지난달 31일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귀환은 한국이 익숙했던 자유주의 세계 질서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강대국끼리 거래하고 지정학적으로 선을 긋는, 힘에 의한 세계가 형성되는 근본적 변화를 나타날 것이란 취지다. 미국이 한·미동맹을 버리지는 않더라도 한·미동맹은 ‘회비를 더내야 하는 클럽’으로 변화하고, 주한미군도 중국 견제에 초첨을 맞추도록 노골적인 요구를 받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국은 우선 기존의 익숙한 외교 패러다임으로는 대응할 수 없는 ‘시대 전환’에 직면해 있음을 명확히 인식하고 현실주의 외교로 자율적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고 차 교수는 강조했다. 차 교수는 트럼프 현상을 미국 정치사상사와 냉전의 역사 속에서 분석한 저서 ‘30년의 위기’ 등으로 주목받는 국제정치학자다.
―트럼프 외교정책은 ‘고립주의’로 평가되는데 한편으로 그린란드나 파나마 운하를 차지하겠다고 하는 등 팽창주의적 측면도 드러내고 있다. 어떤 의미로 봐야할까.
“미국이 19세기에 고립주의를 했다는 것은 유럽중심적 해석이다. 그 시기 미국은 유럽에 대해서는 고립주의를 내세우면서도, 원주민을 ‘보호구역’으로 강제이주시키고 멕시코 영토의 절반 이상을 빼앗는 등 아메리카 대륙에서 팽창주의로 제국을 만들었다. 지금 트럼프가 그린란드, 파나마 운하를 미국이 차지하겠다고 하고, 캐나다를 미국의 51번째주라고 하는 것은 19세기 미국처럼 ‘권력정치’(Machtpolitik)를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자유주의 패권이나 세계 경찰국가 역할에는 더이상 관심이 없고, 미국의 서반구 세력권을 공고히 하면서 파나마 같은 곳에 중국이 들어오는 것을 밀쳐내려 한다. 트럼프가 만들고 싶은 궁극적인 세상은 미국·러시아·중국 등 강대국이 각자 세력권을 구축하는 것이다. 19세기 강대국 간의 세력 균형(콘서트 오브 파워) 또는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전 백악관 국가안보담당 보좌관)가 말한 ‘거대한 체스판’ 같은 세계관이다. 중국이나 러시아가 감히 미국에 덤비지는 못하게 하면서도, 강대국끼리는 협상과 거래를 하는 관계를 만들고 싶어한다. 미국의 자유 패권질서를 당연히 주어진 것으로 가정했던 한국 외교의 패러다임의 전제가 완전히 변해야한다는 뜻이다.”
―트럼프가 중국을 향해 ‘관세전쟁이나 디커플링을 하겠다고 위협하고 있지만, 결국은 거래와 타협으로 간다는 뜻인가.
“트럼프 정부 1기 때도 중국에 대해 관세를 부과하고 강하게 때리다가 결국은 무역협상을 타결했다. 트럼프는 2기에도 취임 초기엔 중국을 매우 강하게 때릴 것이다. 고율관세를 부과하고 디커플링도 추진할 것이다. 하지만 최종 목표는 미국에 유리한 방식으로 일정한 거래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강대국 사이의 최종적 거래는 결국 일종의 지정학적 선긋기다. 러시아와의 선긋기는 ‘동부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가져라’는 것이다. 동아시아의 미래에 가장 중요한 선긋기는 대만이다. 미국 입장에서도 대만은 중요하기 때문에 단기간에 쉽게 넘기지는 않겠지만, 트럼프나 트럼프주의자들이 계속 집권한다면 대만을 중립화하는 식으로 중국과 거래할 가능성도 있다. 이 과정에서 민주주의 같은 가치나 체제 문제는 거의 고려되지 않을 것이다.”
―트럼프가 한국을 중국의 영향권 안에 두는 선긋기를 할 가능성도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미국 입장에서도 한국 만큼 믿을 만한 군사력이 있는 동맹은 드물다. 미국이 필요할 때 무기나 군사력을 제대로 동원해줄 수 있는 나라는 영국이고 그 다음 급이 일본과 우리 정도인데, 육군력만 보면 오히려 한국이 우위에 있다. 하지만 미국이 대만을 놓고 중국과 타협하는 거래를 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한국을 비롯한 동맹국들에서 ‘방기의 공포’가 매우 커질 것이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외교안보 라인이 마이크 왈츠(국가안보실장)-마코 루비오(국무장관)-피트 헤그세스(국방장관)-엘브리지 콜비(국방부 차관) 등으로 짜였다. 어떤 방향을 예상할 수 있나.
“전체적으로 대중 강경파들이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트럼프에 대한 ‘충성’이다. 1기 때보다 훨씬 순도 높은 미국 우선주의 정책을 추진할 것이다. 공화당 내에서도 전반적으로 네오콘 같은 기성 외교노선은 배제되고 젊은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뜻으로, 미국 우선주의를 상징) 세력이 득세하고 있다. 한반도 정책에서는 ‘특별임무를 위한 대통령특사’에 임명된 리처드 그레넬과 국방부 정책차관이 된 엘브리지 콜비가 중요하다. 이들은 북한은 한국이 알아서 하고, 주한미군은 중국 견제에 맞춰 역할을 재조정하거나 철수시킬 수 있으며, 한국의 핵무장 여부는 알아서하라는 식의 주장을 해왔고, 매우 급진적인 소수파로 여겨졌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트럼프 2기 정부에서는 한반도와 관련한 중책을 맡게 되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미국의 자유주의 가치동맹 같은 개념은 사라지고, 세력 경쟁을 펼치면서 한국이라는 패를 어떻게 쓸 것인가로 접근하고 있다. 미국이 한·미동맹을 버리지는 않겠지만 그 형태는 과거와 달라질 것이다. 트럼프는 동맹을 일종의 클럽으로 여기고, 한국은 미국이 제공하는 서비스에 대해 더 많은 회비를 내라고 요구한다. 한·미동맹과 주한미군도 북한을 막는 데서 점점 벗어나 중국에 초점을 맞추려 할 것이다.”
―트럼프 2기 행정부에는 일론 머스크, 피터 티엘 등 정보기술(IT) 기업가들의 영향력도 크다. 이들의 역할이 트럼프 정부의 대외정책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트럼프 정부는 ‘마가 포퓰리즘’과 이들 기업가들이 대표하는 ‘금권주의’의 모순적 결합이다. 이 금권주의 기업가들은 국내 정치·경제에서는 국가 개입 축소를 주장하는 자유방임주의, 리버테리안들이다. 반면 제이디 밴스 부통령 등은 저학력 노동계급의 입장을 우선하는 포퓰리즘 세력을 대변한다. 대외 정책에서는 머스크 같은 기업가들은 글로벌리스트이고 중국에 투자도 많이 했고 대자본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측면이 있다. 반면 벤스 부통령 같은 쪽은 보호무역주의를 얘기하고 중국과 대결을 강조한다. 두 모순적 세력의 공존과 이들 간 ‘싸움’이 어떻게 진행될지가 중요한 관측 지점이다.”
지난해 11월19일(현지시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와 일론 머스크가 텍사스 브라운빌에서 머스크가 소유한 스페이스엑스(X)의 스타십 로켓 발사를 지켜보면서 대화하고 있다. 브라운빌/로이터 연합뉴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트럼프가 취임 뒤 한국에 대해 주한미군 방위비 인상이나 주한미군 철수에 대해 압박에 나설까.
“트럼프는 기존 동맹 구조에 비판적인 입장이다.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한·미동맹 모두 미국을 편취해 이익을 챙겼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더해 트럼프는 1기 때부터 한국을 유독 쉽고 만만한 상대로 보는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선거운동 기간에 한국을 ‘머니 머신’이라고 한 것도 한국은 압박하면 뭔가 많이 얻어낼 수 있는 나라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한국이 바이든 정부와 방위비 협상을 서두른 것이 오히려 더 표적이 될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는 바이든이 한 것은 무조건 지워야한다는 생각이니, 주한미군 방위비 재협상 요구부터 몰아칠 가능성이 더 높다. 그 과정에서 주한미군 철수 얘기도 꺼내면서 거칠게 몰아부칠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가치동맹 같은 논리가 작동할 공간은 전무하다. 우리도 ‘거래’의 자세로 대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한국의 내란과 탄핵 정국이 트럼프와의 외교에 어떤 영향을 줄까.
“일단 트럼프는 완전히 ‘노 코멘트’로 일관하고 있다. ‘민주주의냐, 독재냐’ 같은 질문에 무관심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문제는 트럼프가 한국이 더 만만한 상대가 되었다고 판단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한국 국내 상황이 혼란스러우니 더 미국한테 매달리게 되었고, 한·미동맹이나 주한미군 현안에 대해 자기가 강하게 압박하면 더 많은 것을 얻어낼 것이라 판단할 것이다. 또한 북한 문제에 대해서도 한국을 패싱할 가능성이 더 높아졌다.”
―김정은과의 협상 재개는 트럼프의 우선 순위에 있을까.
“미국 입장에서 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 미-중 경쟁이 제일 중요하고 북한 문제는 상대적으로 후순위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트럼프의 개인적인 순위에서는 북한 문제가 높이 올라와 있다. 트럼프는 자신이 업적을 남기기에 적합한 대상이 북한 문제라고 보는 것 같다. ‘나만이 풀 수 있는 문제’고 ‘내가 다른 어느 누구도 못했던 지점까지 가봤다’는 자신감이 있고, 김정은과의 개인적 관계도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해 예상보다 북·미 대화가 더 빠르게 전개될 가능성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트럼프가 북한 문제를 일종의 동아시아 세력권 조정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마이크 폼페이오의 회고록을 보면 평양에서 폼페이오를 만난 김정은이 ‘중국의 위협으로부터 한반도를 지키기 위해 미군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한다. 구냉전 시기에 중국과 소련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했던 북한이 지금은 미국, 중국, 러시아 사이에서 신냉전 등거리 외교로 이익을 챙기려는 전략을 가지고 있고, 미국도 마다할 이유가 없다. 북한은 중국의 유일한 조약상 동맹국인데, 북한을 미국 쪽으로 끌어당겨 마치 오늘날 베트남처럼 중립화라도 시킬 수 있다면 중국 견제용으로 의미가 있다고 트럼프도 판단할 것이다.”
―북·미 협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한국이 패싱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북한이 추구하는 ‘통미봉남’을 최대한 피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될 외교의 방향이다. 그런데 트럼프나 김정은 모두 남한을 끼워서 협상할 생각은 이제 없는 것 같다. 설령 민주당 정부가 들어와도 한국과 함께 협상하자는 생각은 없다. 이와 관련해서 ‘비핵화 협상이 아니라면 북·미 협상은 무조건 막아야 한다’는 한국의 주장을 재고해야할 시기가 왔다. 비핵화가 아니면 어떤 식의 북·미 협상도 안 된다는 식의 태도는 더이상 현실적이지 않고 긴장만 높이게 된다. 그럴수록 미국과 북한 양쪽 모두에서 통미봉남 상황으로 몰리게 될 것이다. 우리가 명시적으로 비핵화 목표를 포기할 필요는 없지만, 가장 위험한 상황을 진정시킬 정도의 군비통제 협상엔 찬성하면서 그것에 대해 우리 목소리를 낼 방법을 찾아야 한다.”
―북핵 문제가 악화되고 트럼프 행정부가 등장하면서 한국의 자체 핵무장론이 다시 커지고 있다.
“궁극적으로 자구(self-help)를 추구하는 현실주의적 논리로만 보면, 미국의 핵우산도 결국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자체 핵무장이라는 막다른 골목에 이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국이 진짜로 핵무장을 하는 상황이 온다면 세계는 이미 엔피티(NPT·핵확산금지조약)를 비롯해 자유주의적 안보 관련 규범이 모두 무너진 약육강식의 상태가 되었다는 의미다. 특히 한국이 핵 보유국이 된다고 해서 결코 안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인도와 파키스탄을 보면 양쪽이 핵을 가지게 된 뒤 ‘이제 대규모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에 소규모 분쟁은 오히려 더 늘어났다. 이른바 ‘안정-불안정 역설’이다. 핵은 만병통치약이 아니고 최종적 해결책도 아니다. 진정한 안정성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남·북, 북·미 간 외교 협상과 타협, 군비 통제 협상의 과정으로 갈 수밖에 없다. 핵을 가지면 한방에 안보 문제가 해결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리스크를 관리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올해는 광복 80주년이다. 그런데 그 80년 동안 유지되어온 국제질서가 이제 붕괴하고 있다면, 한국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우선 지금이 ‘시대전환’의 상황이고 기존의 단극시대 외교 패러다임으로는 대응할 수 없다는 현실을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 윤석열 정부도 이런 구조적 전환을 인식했기에 ‘가치외교’로 신냉전에 대응한 것이지만, 지나친 ‘전략적 명확성’으로 진영 외교의 위태로운 길에 들어서고 말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중용과 신중함을 추구하는 현실주의적 전략이다. 한국은 중국, 러시아에도 관여가 필요하고, 계속 자율적인 협상의 공간을 만들어 리스크를 관리해야 한다. 한국이 구냉전 시기 서독과 프랑스처럼 미국과의 동맹을 유지하면서도 자율적 공간을 만들어내는 길을 가려면 국가적인 컨센서스를 형성하고 국력을 응집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양극화된 국내정치 상황은 매우 우려스럽다. 일본, 미국, 중국, 러시아에 대한 담론이 상대진영을 공격하는 정쟁의 수단이 되어버렸다. 이번 비상계엄 사태로 상황이 더 어려워지고 있어서 암담하다.”
박민희 선임기자 minggu@hani.co.kr
▶▶한겨레는 함께 민주주의를 지키겠습니다 [한겨레후원]
▶▶실시간 뉴스, ‘한겨레 텔레그램 뉴스봇’과 함께!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