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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2 (목)

[시선2035]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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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어환희 IT산업부 기자


어두운 골목길을 늘 반복해서 도는 한 소년이 있다. 겁에 질린 얼굴로 주변을 살피며 김광석의 노래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벗 삼아 터벅터벅 걷는다. 골목 분위기는 노랫말과 대비돼 을씨년스럽다. 소년은 자신의 다리가 기형적으로 돌아가 있음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라는데, 이승도 저승도 아닌 곳을 헤매는 중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디즈니플러스 드라마 ‘조명가게’에는 교통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진 인물들이 나온다. 몸은 중환자실에 있지만, 정신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떠돈다. 그 경계에서 인물들의 상황은 반복된다. 아무리 걸어도 같은 골목을 빙빙 도는 소년처럼 말이다. 정작 당사자는 반복되는 상황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승에서 일상 생활하듯 생사의 경계에 갇혀 떠돈다.

중앙일보

지난 25일 탄핵 정국 속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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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속 교통사고를 능가하는 사건이 지난 3일 대한민국에서 일어났다. 인간의 의도가 들어갔다는 점에서 ‘사고’ 아닌 ‘사건’이다. 사건의 충격으로 이 나라는 혼수상태가 됐다. 살지도 죽지도 않은 상태로 한 달 가까이 비슷한 상황 안에 갇혀 있다. 주말마다 도심 곳곳에 시민 수만 명이 모인다. 대규모 집회에 전국에서 경찰이 동원되고 지자체 등 행정력도 투입된다. 반복되는 소모전에 국회도 예외는 아니다. 대통령(권한대행 포함)에 대한 탄핵소추안은 열흘에 한 번꼴로 발의됐다. 국내는 물론 외신까지도 연일 비슷한 헤드라인을 쏟아낸다. ‘한국 정치 위기 심화’ ‘정치적 불확실성에 한국 경제·외교 마비 위기’.

현실과 드라마의 차이라면, 이 모든 상황을 만든 자의 태도다. 바퀴에 문제가 있음을 알면서도 운행을 강행했던 극 중 버스 기사는 생사의 경계를 떠도는 승객들을 찾아다닌다. 일일이 미안하다 말하면서 어서 이승으로 돌아가라고 권한다.

“계엄 선포와 관련해 법적·정치적 책임 문제를 회피하지 않겠다”(지난 7일)던 대통령은 “도대체 2시간짜리 내란이라는 것이 있냐. 질서 유지를 위해 소수의 병력을 잠시 투입한 것이 폭동이란 말이냐”(지난 12일)며 일주일도 안 돼 태세 전환하더니,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지난 14일)며 국가적 혼수상태에서 빠져나올 뜻이 없음을 밝혔다. 계엄 사태를 수사하는 공조수사본부의 소환 통보가 3차까지 진행될 동안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헌법재판소가 보내는 서류는 일주일 넘게 받지도 않았다.

한 해를 떠나보내기 직전 불현듯 찾아온 의식 불명의 정국 속에서 ‘시간은 공간보다 위대하다’는 말을 믿어볼 수밖에 없다. 권력이 독점하려 했던 공간보다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쌓아왔고, 쌓아갈 시간이 중요하다는 믿음이다. 부디 의지를 갖고 우리의 빛을 찾아가는 시간이 오길. 중환자실에서 들려오던 노래처럼 우리 스스로에게 응원을 보내본다. “힘겨운 날들도 있지만 새로운 꿈들을 위해~.”

어환희 IT산업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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