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촛불집회에서 한 청년 참가자가 탄핵 문구가 적힌 응원봉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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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보연 | 논설위원
지난 14일 국회 앞 촛불집회에 참가한 대학원생 박아무개(25)씨는 스스로를 “계엄세대”라고 불렀다. 12·3 내란사태가 그의 머릿속에 새긴 각인이 그만큼 깊었다는 말로 들렸다.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소식이 들려오자, 그는 초록색 광선검을 휘두르며 펄쩍펄쩍 뛰었다. 대학생 황아무개(22)씨는 “(계엄 선포를 접하고) 이게 말이 되나 싶었다”고 했다. 소셜미디어에 ‘예쁜 카페’ 인증샷을 올리던 친구들이 이젠 집회 사진을 공유하고 참가 후기를 작성하느라 바쁘다고 했다. 집회 참가는 처음이었지만, 황씨와 그의 친구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집회장에 나섰다.
열하루 동안 국회 앞을 가득 메운 촛불집회의 주력은 단연 20대 청년층이었다. 참가 인원도 많았지만 그 결기도 놀라웠다. 집회 시작 몇시간 전부터 맨 앞자리를 맡으러 나왔고, 밤늦은 시각까지 응원봉을 흔들며 구호를 외쳤다. 대통령이 국민을 상대로 총부리를 겨눴지만 두려움 따윈 보이지 않았다. 시국선언 대자보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리고, 생전 처음 보는 신문 호외를 ‘역사 굿즈’로 챙겼다. 대학 교정에선 수천명이 모인 학생총회가 열려 교과서 속 직접 민주주의가 구현됐다. 집회·시위 경험이 많은 민주화세대도 ‘계엄세대’의 비분강개에 적잖이 놀랄 정도였다. 이들의 분노는 어디에서 나온 걸까?
첫째로, ‘내란 수괴’ 윤석열은 20대에게 너무나 당연시되어온 민주주의를 일순간에 무너뜨렸다. 황씨와 친구들이 계엄 선포 직후 나눈 단톡방 대화는 다음날 자신들이 안전하게 학교에 갈 수 있는지였다. 헬기와 특수부대가 국회를 침탈하고 도심 한복판을 장갑차가 누비고 다녔다. 일상의 안전이 위협받는 순간이었다. 포고령 초안에는 42년 전 폐지된 ‘야간 통행 금지’ 조항을 넣는 방안까지 검토됐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오랜 기간 사회운동을 연구해온 신진욱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사람들이 자명한 도덕적 전제가 현실에 의해 부정되면 그에 대해 매우 격렬한 반응을 보인다”며 “당연시됐던 것들이 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의식의 각성이 새롭게 형성된 것”이라고 해석한다. 민주주의를 물과 공기처럼 누려온 청년들은 군부독재 시절을 지나온 기성세대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탄핵에 반대한 무책임한 여당은 이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지난 7일 탄핵소추안 1차 표결이 불발되자, 부산의 촛불집회 연단에 오른 한 여고생은 “시민이 정치인에 투표를 독려하는 나라가 세상 천지 어딨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여당 의원이 “비상계엄은 고도의 정치행위” “1년 뒤엔 다 찍어준다”는 몰염치한 발언을 쏟아내는 동안, 청년들은 지역구 사무실을 찾아가 규탄 대자보를 붙였다.
둘째, 즉각적이고 선명한 자기표현과 협업에 능숙한 세대적 특성은 더 큰 분노를 조직했다. ‘젠지’(Gen-Z) 혹은 ‘주머스’(Zoomers·화상 앱 ‘줌’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세대)라고 불리는 이들은 1990년대 중후반생부터 2010년대 초반생까지다. 대략 14~29살 정도다. 1970년대 태어난 엑스(X)세대의 자녀들이자, 포스트 밀레니얼(M) 세대다. 젠지는 어려서부터 공동으로 과제를 수행하고 함께 성적을 받는 데 익숙하다. 인터넷 없는 세상을 모른다고 해서 ‘디지털 네이티브’로도 불린다. 이들은 디지털 기술을 적극 활용해 협업의 성과를 신속히 만들어낸다.
록 페스티벌의 깃발과 케이(K)팝 팬클럽에 익숙한 청년들은 자신들의 문화적 특성을 집회장으로 옮겨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칼바람에 대비하기 위해 핫팩을 나눴고, 집회장 인근의 화장실과 선결제 지도를 만들어 공유했다. 민중가요부터 케이팝까지 망라된 촛불집회 플레이리스트는 세대를 막론하고 하나의 덩어리가 되도록 견인했다.
탄핵소추안 표결을 앞둔 14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이 모여 있다. 김영원 기자 forever@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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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이들은 진영정치에 진저리를 치고 정치에 무관심한 듯 보이지만, 그들만의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지탱할 시민성을 길러왔다. 자신의 정체성에 부합하는 다양한 소모임 활동을 선호한다. 기후위기와 불안정노동, 젠더 불평등을 비롯한 다양한 이슈에 목소리를 낸다. 이번에 20대 여성의 집회 참여가 가장 많았던 것도 혐오와 차별에 대한 누적된 불만의 표출이었다. 이승윤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다양한 정체성을 지니고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청년들이 서로의 요구가 교차되는 지점에서 만나면 강한 추동력을 갖는다”고 했다.
“오케이, 부머(Boomer).(그만 집어치워, 꼰대야)” 대화가 통하지 않는 ‘꼰대’(베이비부머)를 가리키는 것으로, 2019년 영미권에서 유행한 말이다.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할 막대한 책임이 젠지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음을 부머들이 이해 못 하는 데서 오는 좌절감의 발로를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젠지: 디지털 네이티브의 등장’(로버타 카츠 외)에서 저자들은 “이들은 이미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상실한 기존 제도를 별반 달라진 것 없이 물려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변화의 방법과 수단을 만들어내고 일상을 보다 잘 살아내는 것에 관심을 둔다”고 했다. 하루아침에 계엄세대가 된 청년들의 심경이라고 얼마나 다르겠나.
미국 포브스는 지난 6일(현지시각) “비상계엄 사태에 대한 대가는 대한민국 5100만명 국민이 할부로 치르게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할부 기간이 길어질수록 청년들의 고통은 가중된다. 아직도 반성 없이 정신 못 차리고 있는 집권당이 새겨야 할 대목이다. 아울러 우리 사회의 미래를 지킬 힘을 보여준 청년들의 앞으로의 활약에도 응원을 보낸다.
whyn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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