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의 글쓰기 원포인트 레슨]연상을 자유롭게 풀어내는 대신 일반적 범주에 배치하라
“울
▲백우진 글쟁이㈜ 대표 |
음 우는 아이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원 한쪽 구석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추의 양광이 떨어질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수필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이렇게 시작한다. 초가을뿐 아니라 만추, 나아가 초겨울에도 어울리는 작품이다. 독일 문인 안톤 슈낙(1892~1973)이 1941년 쓴 이 글은 독문학자 김진섭에 의해 처음 번역됐다. 이후 1974년 한국에서 그의 다른 산문들과 함께 다시 번역·출간됐다.
수필집을 낸 출판사는 슈낙을 ‘마음결에 아련히 파고드는 독일 최고의 산문 작가’라고 소개한다. 그의 작품 스타일에 대해서는 ‘낭만과 서정성을 담은 시적이고 화려한 문체와 인생을 달관한 시선’이라고 표현한다. 슈낙은 독일 프랑켄 지방 리넥에서 태어났다. 주로 신문기자와 신문 문예란 편집자로 활동했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모두에 참전했다. 1919년 첫 시집 〈욕망의 시절(詩節)〉을 내며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시집 몇 권과 장편소설 두 편을 발표했다. 한편 그의 형 프리드리히 슈낙(1888~1977)도 작가로 활동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중 〈낯선 문학 가깝게 보기: 독일문학〉은 안톤 슈낙이 “독일문학사에서 뚜렷한 작가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라고 평가하기는 어렵다”고 평한다. 그러나 “슈낙의 문학적 성과는 짧은 산문에서 돋보인다”면서 “우리 주변의 다양한 사물과 소박한 풍경, 일상의 사소함에 대한 예리하고 섬세한 시선, 자연에 대한 낭만적 서정성”을 특징으로 든다.
슈낙은 1930년대부터 꾸준히 산문집을 발간했다. 그중 1941년 발표한 산문집에 실린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가장 널리 알려진 수필로 꼽힌다. 출판사는 이 산문이 “일상의 작은 떨림, 기쁨들을 회상하듯 향기와 음향, 촉각에 이르기까지 모든 감정을 동원해 지난날의 추억, 고향에 대한 향수, 젊은 날의 사랑과 방황, 자연에 대한 친밀한 애정 등을 치밀하고 섬세하게 그려냄으로써 환상의 경지로까지 승화”시켰다고 평가한다.
이 수필의 중간 부분을 일부 생략하고,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서두와 다음 인용문은 과거 국어 교과서에 실린, 김진섭 번역본에서 발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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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전략) 동물원에 잡힌 범의 불안, 초조가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중략) 이것이 우리를 말할 수 없이 슬프게 한다.휠 데를린의 시구. 아이헨도르프의 가곡. 옛 친구를 만날 때. 학창 시절 친구의 집을 찾아 방문하였을 때. 그러나 그가 이제는 우러러볼만한 한 사람의 고관대작, 혹은 돈이 많은 공장주로서의 지위를 가져, 우리가 몽롱하고 우울한 언어를 조종하는 한 시인밖에 못 되었다는 이유로, 우리에게 손을 주기는 하나, 달갑지 않은 태도로 우리를 대한다고 벌써 느껴질 때.포수의 총부리 앞에 죽어가는 사슴의 눈망울.재스민의 향기, 항상 이것들은 나에게 창 앞에 늙은 나무 한 그루가 있는 내 고향을 생각하게 한다.공원에서 들려오는 고요한 음악. 그것은 꿈같이 아름다운 여름 밤에, 모래 자갈을 고요히 밟고 지나가는 사람의 발자국 소리처럼 들리고, 노래의 한 소절 같은 쾌활한 웃음소리가 귀를 간질이는데, 그러나 당신은 벌써 근 열흘이나 침울한 병실에 누워 있는 몸이 되었을 때. 달아나는 기차가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것은 황혼의 밤이 되려 할 즈음, 불을 밝힌 창들이 유령의 무리같이 시끄럽게 지나간다. 창가에서 은은히 웃고 있는 어떤 여성의 아리따운 얼굴을 볼 때. (중략)공동묘지를 지나갈 때, 거기서 문득 ‘여기 열다섯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난 소녀 클라라가 누워 있음’이라 쓴 묘비를 읽을 때. 아, 그 소녀는 어렸을 적 단짝 동무 중의 한 사람. (중략)첫길인 어느 촌 여관에서의 외로운 하룻밤. 시냇물의 졸졸거리는 소리. 곁방 문이 열리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리며, 낡아빠진 헌 시계가 새벽 한 시를 둔탁하게 칠 때, 그때 당신은 난데없는 애수를 느낄 것이다.날아가는 한 마리의 철새. 추수 후의 텅 빈 밭과 밭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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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수필의 특징 중 하나가 밑줄로 표시된, 불쑥 들어간 구절들이다. 이 구절들을 볼 때면 ‘의식의 흐름 기법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의식의 흐름은 모더니즘 소설에서 주로 사용한 소설 기법이다. 등장 인물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과 기억, 자유 연상, 마음에 스치는 느낌을 그대로 적는 기법을 가리킨다.
◇흩어진 ‘조각 구절들’ 재구성 가능
이들 구절은 독자의 정서를 슈낙의 자유 연상에 따라 움직이도록 하는, 그럼으로써 슈낙의 슬픔에 더욱 동조하도록 하는 효과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이들 구절을 일정한 범주 속에서 넣는 대안이 가능하다. 그런 대안을 읽는 독자는 슈낙의 분절된 슬픔을 잠시 스쳐가는 대신 슬픔의 범주에 머물게 된다.
필자가 재구성한 대안 문단들은 다음과 같다. 수필집의 원문에 흩어진 이들 구절을 찾아 밑줄을 그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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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 추수 후 텅 빈 밭과 밭들, 가을 밭에 보이는 연기, 날아가는 한 마리 철새, 산길에 흩어진 비둘기의 깃털, 포수의 총부리 앞에 죽어가는 사슴의 눈망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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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중 ‘동물원에 잡힌 범의 불안’으로 시작하는 문단은 위 문단 다음으로 전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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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 휠 데를린의 시구, 크누트 함순의 이삼절, 바이올린 G현의 소리, 아이헨도르프의 가곡, 지붕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 둔한 종소리, 보름밤에 개 짖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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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차경아 교수가 옮긴 번역본에는 ‘휠 데를린의 시구. 아이헨도르프의 가곡’ 구절이 없다. 또 이 번역본에는 김진섭 번역에 없는 문단이 있다. 이들 문단의 맨 뒤에는 이 수필에서 여러 번 반복되는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가 생략됐다.
기울임체로 표시한 두 문단을 가까이 배치하는 대안도 가능하다. 우리를 먼 곳으로 데려다주는 기차에 대한 서술은 낯선 곳에서 보내는 밤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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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 달아나는 기차가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것은 황혼의 밤이 되려 할 즈음, 불을 밝힌 창들이 유령의 무리같이 시끄럽게 지나간다. 창가에서 은은히 웃고 있는 어떤 여성의 아리따운 얼굴을 볼 때.첫길인 어느 촌여관에서의 외로운 하룻밤. 시냇물의 졸졸거리는 소리. 곁방 문이 열리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리며, 낡아빠진 헌 시계가 새벽 한 시를 둔탁하게 칠 때, 그때 당신은 난데없는 애수를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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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과 고향 사람들이 불러일으키는 정서를 모아서 독자에게 전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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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 재스민의 향기, 항상 이것들은 나에게 창 앞에 늙은 나무 한 그루가 있는 내 고향을 생각하게 한다. (중략) 공동묘지를 지나갈 때, 거기서 문득 ‘여기 열다섯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난 소녀 클라라가 누워 있음’이라 쓴 묘비를 읽을 때. 아, 그 소녀는 어렸을 적 단짝 동무 중의 한 사람.옛 친구를 만날 때. 학창 시절 친구의 집을 찾아 방문하였을 때. 그러나 그가 이제는 우러러볼 만한 한 사람의 고관대작, 혹은 돈이 많은 공장주로서의 지위를 가져, 우리가 몽롱하고 우울한 언어를 조종하는 한 시인밖에 못 되었다는 이유로, 우리에게 손을 주기는 하나, 달갑지 않은 태도로 우리를 대한다고 벌써 느껴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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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대안 중 위에서 생략한 부분에 원문의 어떤 부분이 알맞을까? 원문을 읽으면서 생각해보면, 슬픔의 정서에 더해 구성과 전개의 기법도 얻을 수 있다. 구성과 전개는 글쓰기에서 상당한 사고를 요하는 기법이다. 다양한 내용을 담은 각 문장이 어떤 범주에 속하는지 분류하는 과정은 결코 단순한 작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범주 사고는 마음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서술에서는 더욱 기본적으로 요구된다.
◇독자를 슬프게 한 작가의 행위
이 작품의 온전한 이해를 방해하면서 그야말로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이 있다. 안톤과 그의 형 프리드리히가 독재체제를 확립한 아돌프 히틀러에 충성을 맹세한 문인 88인의 선언에 참여한 것이다.히틀러는 1933년 3월 의회를 우회해 마음대로 법률을 통과시킬 수 있는 권력을 장악했고, 10월에는 언론을 정부 통제하에 두는 편집자법을 통과시켰다. 이 선언은 10월 26일 여러 일간지에 발표됐다.
문인들은 두 문장 선언문을 통해 “평화와 노동, 자유, 명예는 각 국가의 가장 신성한 재산이며, 국민들이 서로 정직하게 공존하기 위한 전제 조건입니다”라고 한 뒤 “우리의 힘과 회복된 통일에 대한 의식, 우리 국가 안팎에서 평화의 대의를 위해 무조건적으로 봉사하려는 우리의 진심 어린 의지, 제국 재건에 대한 우리의 임무에 대한 깊은 확신, 그리고 우리의 명예와 조국의 명예에 맞지 않는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결의는, 이 중대한 시간에, 제국 수상님(히틀러)께 우리의 가장 충실한 충성의 서약을 제출하게 합니다”라고 맹세했다. 서정적인 표현과 전체주의에의 헌신이 한 작가에 공존하는 경우도 발견된다. 그러나 후자는 독자가 그 작가의 작품을 온전히 향유하는 것을 방해한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ader) 12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백우진 글쟁이(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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