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케이(K)팝 실물 음반의 구성품 모습.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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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민주주의를 복원하는 광장에서 케이(K)팝을 불렀다. 케이팝은 이제 대한민국 정신문화를 대변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하지만 산업 자체만 놓고 보면, ‘덩치’만 커졌을 뿐 내적 성숙은 아직 멀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해 한국 음악산업 매출은 12조원을 넘었다. 5년 전인 2018년 6조원에 견줘 두배가 넘는 성장을 한 셈이다. 짧은 기간에 돈이 몰리면서 온갖 부작용이 나오고 있다. 아이돌의 인권 문제는 여전히 지적되고 있고, ‘봉이 김선달’식 상술이 판을 친다. 케이팝 종주국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제대로 된 공연장이 턱없이 부족하다. 이런 케이팝 산업의 문제점을 3회에 걸쳐 짚는다.
아이돌 그룹 엔하이픈의 팬 박아무개(25)씨는 지난해 11월께 엔하이픈의 미니앨범 ‘오렌지 블러드’ 20장을 한꺼번에 구매했다. 30만원 넘게 들여 이토록 많은 앨범을 구매한 것은 팬미팅 때문이다. “앨범을 구매해야 팬미팅에 응모할 수 있거든요. 많이 구매하면 당첨되는 것인지, 혹은 단순 추첨인지 명확하지 않더라고요. 혹시 몰라서 여러장 샀죠.” 박씨는 어릴 적부터 케이팝을 즐겨 들었고, 지금은 적극적인 케이팝 소비자가 됐다. 하지만 앨범을 대량 구매할 때마다 씁쓸해진다. “앨범이 음악을 듣는 수단으로서의 의미를 잃은 것 같아서 안타까워요.”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로 음악을 듣는 것이 보편화된 시대지만, 케이팝의 실물 앨범 판매량은 매년 고공행진 중이다. 지난해 써클차트 기준 ‘앨범 판매량 400’(1위부터 400위까지 앨범 판매량)이 전년 대비 50.1% 증가했을 정도다. 문제는 이런 성장세의 이면에 팬심을 이용한 기획사의 왜곡된 마케팅이 자리한다는 것이다. 팬들은 ‘봉’ 취급을 당하는 것을 알면서도 좋아하는 가수를 위해 수십만원에서 수백만원까지 쓰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앨범에 팬 사인회 같은 행사 응모권을 넣어 파는 것이 대표적인 ‘팬덤 마케팅’ 중 하나다. 이는 앨범의 초동 판매량(발매일 기준 일주일 동안 팔린 앨범의 수량)을 늘리려는 기획사의 ‘꼼수’로 지적된다. 기획사들은 앨범 발매 첫 주에 팬 사인회 등 행사를 몰아서 잡는데, 참석자는 보통 추첨을 통해 정한다. 팬들은 당첨 확률을 높이기 위해 응모권을 최대한 많이 확보하려 한다. 그만큼 많은 앨범을 구매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에 따라 초동 판매량은 숱한 허수와 함께 증가한다. 코로나 팬데믹을 계기로 가수와 팬의 비대면 영상통화 이벤트도 도입되면서 이런 시장은 더욱 확장하고 있다.
김나연 케이팝포플래닛 활동가는 지난 11월 열린 ‘지속가능한 케이팝 올바른 소비문화 조성을 통한 기후대응방안 모색 토론회’에서 “팬들은 영상통화 팬 사인회를 위해 50∼150장의 앨범을 구매하기도 한다”며 “앨범 한장당 가격은 1만1천원에서 1만9천원으로 많게는 258만원가량을 지출한다”고 전했다.
‘팬싸 컷’(팬 사인회 커트라인의 줄임말로, 안정적으로 팬 사인회에 가기 위해 구매해야 하는 앨범의 양)을 알아내려는 현상도 등장했다. 실제로 ‘팬싸 컷’이라는 게 존재하는지 밝혀진 바 없지만, 팬들 사이에서는 ‘특정 그룹의 팬 사인회에 가려면 앨범을 50장은 구매해야 한다’는 식의 정보가 돈다. 당첨 경험을 바탕으로 앨범 몇장을 사면 팬 사인회에 당첨되는지 정보를 판매하는 신종 거래도 생겨났다.
일본 도쿄 시부야 한 거리에 대량으로 버려진 케이팝 앨범. 에스엔에스 갈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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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챠’(Gacha·무작위 상품 증정)와 같은 랜덤 포토카드나 아이돌 굿즈 등은 팬들이 즐기는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지만, 이 또한 팬심을 이용한 ‘봉이 김선달’식 상술이라고 지적받는다. 포토카드는 앨범에 카드 형태로 들어 있는 아이돌 그룹 멤버 사진인데, ‘랜덤’(무작위)이라는 말이 뜻하는 것처럼 앨범마다 어떤 멤버의 사진이 들어 있을지 알 수 없다. 팬들은 ‘최애 멤버’(가장 좋아하는 멤버)의 포토카드를 얻기 위해 여러장의 앨범을 구매하기 일쑤다. 한국소비자원에서 2022년 10월11일부터 11월4일까지 최근 2년간 유료 팬덤 활동 경험이 있는 5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굿즈 수집’을 목적으로 음반을 구입했다는 응답이 52.7%에 이르렀다.
아이돌 굿즈 구매 과정에서 환불 조건을 까다롭게 설정해 소비자의 권리를 충분히 보장하지 않는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 8월 개봉 과정을 촬영한 영상이 없다는 이유로 환불을 거부하고, 제품 수령 시점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를 사전에 제공하지 않는 등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을 위반했다며 ‘위버스컴퍼니’ 등 4개 굿즈 판매사업자에게 시정명령·경고·과태료 처분을 내리기도 했다.
팬심을 이용한 무분별한 마케팅에 팬들의 불만은 쌓여간다. 박씨는 “앨범 판매량이 곧 아티스트의 성공 지표에 반영되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허수를 늘리다 보면 앨범 판매량을 근거로 하는 많은 통계들이 무용지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케이팝은 팬들만 듣는 음악’이라는 인식에는 이런 안일한 마케팅이 한몫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또 “이런 식으로 고착화된 문화가 바뀌지 않는다면 제 가치관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케이팝이라는) 취미를 포기하게 될 것 같다”고 덧붙였다.
지난 9월4일 서울 용산구 하이브 사옥 앞에서 케이팝포플래닛 활동가들이 케이팝 업계의 앨범 상술에 따른 환경오염을 규탄하는 ‘플라스틱 앨범의 죄악’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케이팝포플래닛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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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 취급에 대한 불만만큼이나 케이팝 마케팅이 환경에 미치는 악영향을 우려하는 팬들도 적지 않다. 응모권이나 포토카드를 얻고 쓸모없어진 앨범이 버려지는 과정에서 문제의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국외에 거주하는 케이팝 팬들에게 포토카드나 팬 사인회 응모권 등만 보내주고 실물 앨범은 수수료를 받고 버려주는 ‘폐기 중간업자’ 격인 ‘웨어하우스’ 시장이 생겨났을 정도로 앨범 처분은 골칫거리다.
인도네시아에 거주하는, 그룹 에이티즈 팬이자 케이팝포플래닛 활동가인 누하 이자투니사는 한겨레와 한 서면 인터뷰에서 “2021년만 해도 모든 포토카드를 구입하곤 했지만, 2022년부터 여러장의 앨범 구매와 포토카드 수집을 중단하기로 했다”며 “팬콜(가수와의 영상통화)이나 포토카드 같은 기획사의 홍보 방식은 팬들로 하여금 더욱 많은 것을 갈망하게 만들었다. 이제는 플라스틱 오염이 삶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면서 현명한 ‘덕질’을 하고 싶어졌다”고 말했다.
이에 케이팝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 업계의 자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기획사는 한정된 팬덤을 통해 수익을 내기 위해 팬 사인회나 포토카드 등의 마케팅을 계속하고, 이런 마케팅을 수용할 수 있는 팬들만 남게 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지적했다. 그는 “원하는 포토카드 하나를 얻기 위해 여러장의 음반을 구매하는 것은 산업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엄청난 문제이기 때문에 팬들도 거부감을 느낄 것”이라며 “어느 순간이 되면 팬들이 이탈하고 이런 식의 마케팅이 오히려 (기획사들에) 손해가 될 수 있다”고 짚었다.
김민제 기자 summ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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