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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7 (화)

인권위 흔든 이명박·윤석열 정부…반인권 인사들 전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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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01년 1월 13일간의 단식농성을 마친 인권활동가들이 국회로 이동해서 국가인권위원회 설립을 요구하는 기습시위를 벌였다. 인권운동사랑방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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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혹한의 추위와 폭설을 이겨내야 하다 보니 단식 중이던 인권활동가들이 속속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갔다. 나도 단식농성 9일째인 2001년 1월5일, 순간 머리가 띵하더니 눈앞이 깜깜해지면서 쓰러졌다. 단식하면서 상황실장까지 맡다 보니 힘이 들었던 탓일 것이다. 앰뷸런스에 실려 서울 사당의원으로 갔더니 링거 주사를 놓아주었고, 저녁식사라고 흰 쌀죽을 한사발이나 내주었다. 아흐레나 추위 속에 굶었으니 그 죽이 얼마나 맛있겠는가. 배가 부르도록 나온 죽을 다 먹었다. 요즘 상식으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단식 뒤에 회복식이 중요하니, 미음부터 단계를 높여서 음식량을 조금씩 늘려 먹어야 하는데 병원에서 먹은 죽이 얼마나 맛있던지 허겁지겁 다 먹어 치웠다.



하루 병원에서 쉬고 다시 농성장에 나갔다. 이제 단식 농성단은 백명이 넘어갔다. 시민사회 전체가 결합해, 정치권을 압박해 갔다. 1월8일 오후에는 종교인들이 ‘3대 개혁입법 제정 및 폐지 시민·종교인 기원대회’를 열었고, 저녁에는 민중가수들이 대거 참여한 문화 한마당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단식농성을 이튿날인 9일에 접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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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월 13일간의 단식농성을 마친 인권활동가들이 국회로 이동해서 국가인권위원회 설립을 요구하는 기습시위를 벌였다. 인권운동사랑방 제공


1월9일에도 폭설이 쏟아졌다. 오전 10시,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가인권위원회의 실질적 독립성과 실효성을 보장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를 취할 것, 국가보안법은 폐지되어 마땅하나 이번 국회 회기 중에 적어도 7조를 폐지할 것, 특별검사제 도입과 내부 비리 제보자 보호 조치 마련 등 실효성 있는 부패방지법을 제정할 것”을 촉구했다. 기자회견을 마친 인권활동가들은 급히 국회로 이동하여 기습 시위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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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월 서울 명동성당에서 국가인권위원회 설립과 국가보안법 폐지를 요구하는 단식농성을 하던 중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들이 한데 모였다. 앞줄 맨 오른쪽이 박래군 필자. 앞줄 세번째가 서준식 대표. 인권운동사랑방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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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활동가들과 시민사회가 한목소리로 외치고 요구한 덕분이었을까. 다시 국회에서 국가인권위 법안 논의가 시작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4월30일 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재적의원 273명 중 찬성 137명, 반대 133명, 기권 3명으로 찬성과 반대 표차가 겨우 4표였다. 3년 넘게 싸웠는데도 이렇게 아슬아슬한 표차로 통과되었다. 그만큼 당시 여당이었던 새천년민주당 의원들도 많이 반대했다. 이 법은 5월24일, 제정·공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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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대통령이 2001년 5월23일 청와대에서 국가인권위원회법 공포문에 서명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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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적 준헌법기관 된 인권위





국가인권위원회법은 “헌정사상 처음으로 입법부·사법부·행정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된 국가기구”를 법률로 만들어냈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었다. 집요하게 법무부 산하 기관으로 설치하려던 시도를 극복하고 싸워서 얻은 결과였다. 수사기관에서 인권침해를 당한 경우 인권위가 직접 조사를 할 수 있고, 사인 간의 차별행위에 대해서도 조사할 수 있게 되었다. 장애나 성별 등을 이유로 기업에 채용을 거부할 때 인권위가 나서서 조사도 하고 시정도 권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구금시설이나 보호시설에 수용된 사람들도 인권위에 직접 진정할 수 있게 되면서 인권 사각지대에서 벌어지는 인권침해를 시정할 수 있게 되는 등 많은 내용이 법률에 담겼다. 한계도 많았다. 국가기관에 의한 인권침해만 조사할 수 있다든지, 수사기관이 수사하는 사건이나 재판 중인 사건은 조사가 불가능했다. 국가인권위원장을 대통령이 임명하는 것도 독립성을 흔들 수 있는 중요한 약점이었다.



이런 약점 속에서도 국가인권위 설립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8월1일, 김대중 대통령은 초대 국가인권위원장으로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출신의 김창국 변호사를 임명했다. 곧이어 설립준비단도 만들어졌고, 인권단체들의 간담회도 진행되었다.



11월25일, 직원 정원과 직제령 등으로 정부와 이견이 해소되지 않아서 사무처 직원 없이 인권위원들만으로 국가인권위는 출범했다. 제1호 진정사건은 서울대 의대 김용익 교수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제천보건소장으로 임명되지 못한 제자를 대리해서 접수했다. 유명 성우 양지운씨도 종교적 신념을 지키며 ‘양심적 병역 거부’를 했다가 구속된 아들을 대신해서 사건을 접수했다. 상습적인 폭행과 욕설을 견디다 못해 피신 중이었던 외국인 노동자들은 크레파스와 물감 색깔 가운데 ‘살색’을 없애달라고 진정했다. ‘크레파스 색상의 피부색 차별 권고’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조사관이 구성되지 않았는데도 출범 첫날 122건의 사건이 접수되었다. 이런 첫날 풍경은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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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권위원회가 공식 출범한 2001년 11월, 서울 수송동 인권위 진정서 접수처에 이른 아침부터 진정인들이 나와 진정서를 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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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단체 따돌린 인권위 설립 과정





이런 설립 과정에서 내가 속해 있던 인권운동사랑방을 비롯해 혹한기 단식농성에 참여했던 다수의 인권단체들이 배제되었다. 우리에게는 공유되지 않은 소식들을 언론보도를 통해서 접하게 되었다. 지금도 나는 왜 우리가 국가인권위 설립과정에서 배제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을 듣지 못했다. 설립 과정에서 배제된 다산인권센터, 울산인권연대 등 35개 인권단체들은 ‘국가인권위 바로 세우자! 인권단체 연석회의’를 구성해 “국가인권위는 설립 과정에서부터 다른 정부기구와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촉구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인권운동사랑방을 비롯한 몇몇 단체는 김창국 변호사가 국가인권위원장에서 물러난 2004년까지 협력 거부를 유지했다.



국가인권위가 자리를 잡아가면서, 특히 감옥의 인권상황이 많이 개선되었다. 수형자들이 직접 인권침해를 진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새까만 ‘먹방’이 사라졌고, 감옥 내 폭력이 많이 사라졌다. 사회복지시설, 군대 같은 인권 사각지대에도 감시의 손길이 뻗쳐 갔다. 각종 차별 사건에 대한 의미 있는 결정들이나 이라크 파병 반대, 국가보안법 폐지 권고 등 의미 있는 정책 권고들도 내려서 우리나라 인권기준을 세워 가고, 선도해 갔다. 유엔을 비롯한 국제적인 평가도 좋아서 모범적인 국가인권위 사례로 외국에 많이 알려졌다.



하지만 준헌법기관으로 법이 독립적 운영을 규정하고 있어도, 국가인권위는 실제 ‘약체’ 국가기관이었다. 예산 편성권이나 인사권도 행정안전부와 협의해야 했다. 정부의 협조를 받지 못하면 그만큼 운영이 어려워지는 기관이었다. 보수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국가인권위는 크게 흔들렸다.





인권위 망가뜨린 보수 정부





2008년 1월 인권활동가들은 다시 명동성당 들머리에 모여야 했다. 대통령에 당선된 이명박 정권 인수위원회가 국가인권위를 대통령 직속기구로 만들려 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즉각적으로 유엔에 알려져서 항의를 받았다. 우리는 이번에는 릴레이 단식농성으로 대응했다. 그래서 대통령 직속기구화는 저지했다. 그러나 조직은 축소되었고, 안경환 위원장의 후임으로 현병철 위원장이 임명된 뒤에는 독립성 등의 훼손 등으로 국제기구에서 A등급에서 B등급으로 평가가 떨어졌다. 국가인권위는 본래의 기능을 잃고 정부의 인권침해에 침묵하는 기관이 되어 버렸다. 2008년 이른바 광우병 촛불시위 때 경찰의 폭력진압에 대해서도, 2009년 용산 참사 때도 침묵했다. 청와대는 조사관들의 성향을 파악했고, 불이익을 주었다. 이런 점들에 항의해서 당시 문경란 상임위원, 조국 비상임위원 등이 사임을 하고 직원들이 1인 시위를 하는 등 항의 행동들이 이어졌다. 현병철 위원장은 연임하여 6년 동안 국가인권위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런 뒤에 다시 국가인권위가 정상화되는 듯했지만, 윤석열 대통령이 정권을 잡고 난 다음에는 더욱 심각한 상황을 맞게 되었다. 이충상, 김용원 상임위원이 등장했다. 그들은 국가인권위를 파괴하려는 목적으로 상임위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듯이 행동했다. 공개 석상에서 모욕적이고 차별적인 언행을 마구 뱉어냈다. 상임위 규칙도 후퇴시켰다. 이런 행동들은 언론에 많이 보도되어 망신을 당했다. 그런 상황에서 차별금지법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활동을 해온 극우 보수 인사인 안창호 변호사가 국가인권위원장에 임명되었다. 이제 국가인권위는 차별금지법 제정이라는 숙명적인 과제를 추진하는 동력을 상실하고, 도리어 인권침해 기관으로 탈바꿈할 것이 우려된다.



윤석열 정권 등장 이후 인권 후퇴 현상은 심각하다. 그중에서 국가인권위도 망가졌고, 지자체의 인권조례들, 학생인권조례들도 속속 폐기되고 있다. 법률과 제도를 만드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지키는 일도 그만큼 힘들다.





박래군 | 36년째 인권운동가로 살고 있다. 유가협,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재단 사람을 거쳐서 현재는 4·16재단 운영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 ‘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 공저서 ‘이따위 불평등’ ‘새로고침’ ‘살아남은 아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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