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2.16 (월)

[조용헌 살롱] [1474] 돌탑의 에너지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몇 년 전에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 산을 등반했던 적이 있다. 항상 눈이 쌓여 있는 설산을 한국에서는 보기 어려우니까 더 아름답게 보였다. 흰눈이 쌓인 설산을 본다는 것은 마음을 정화시키고 에너지를 받는 일이었다. 만년 설산은 내가 포기했던 삶의 이상(理想)을 다시 상기시켜 주었다. 안나푸르나는 어느 방향에서 보느냐에 따라 봉우리의 모습이 달랐다. 봉우리 모습이 각도에 따라 다르다는 것은 거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도 각기 다르다는 이치를 의미한다.

산의 에너지를 골고루 받기 위해서는 산 전체를 한바퀴 돌 필요가 있었다. 라운드 트레킹이다. 라운드 트레킹을 축소한 것이 불교의 ‘탑돌이’이다. 탑을 가운데 놓고 계속 빙빙 도는 일이다. 탑 속에 있는 진신사리(眞身舍利)의 에너지를 돌면서 받는 것이 탑돌이다. 탑을 볼 때마다 라운드 트레킹을 생각한다. 패션모델 사진 찍다가 전환하여 국내의 돌탑을 전문적으로 찍는 양현모(61) 작가. “왜 돌탑을 찍냐?” “변하지 않는 마음에 대한 그리움이다. 천년이 넘게 그 자리에서 그대로 지키고 있는 탑을 볼 때마다 인간의 얄팍한 변덕심이 위로받는다”.

그가 꼽는 탑들 몇 개. 경북 영양 산해리 5층 모전석탑이 있다. 마른 탑이 아니고 후덕해 보이는 탑이다. 아침에 떠오르는 햇볕을 받으면 탑 전체가 금빛으로 빛난다. 황금으로 치장된 탑으로 보인다.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충만감이 든다. 충남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 백제의 균형 잡힌 단아한 미를 대표하는 석탑이다. 1층 탑신에는 백제 멸망 당시 당나라 소정방의 업적이 새겨져 있다. 망국의 설움을 간직한 탑이면서도 그 우아함을 잃지 않고 있다. 강릉 신복사지 3층석탑. 탑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있는 보살 좌상이 이색적이다. 보살상의 살짝 미소 짓는 온화한 얼굴 표정이 묘사되어 있다.

경주 감은사지 3층 석탑. 깔끔하고 군더더기가 없으며 안정감을 준다. 신라 국운 상승기의 안정감이 묻어난다. 구례 화엄사 4사자 삼층석탑. 4마리의 사자가 탑을 받치고 있다. 화엄사 각황전 뒤편 동백나무 숲을 끼고 있는 돌계단을 올라가면 나타난다. 지리산 노고단에서 내려오는 가장 센 기운을 여기에서 잡아주어 머물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전남 강진 월남사 3층 석탑. 고려시대 탑이다. 석탑 뒤로는 불꽃같은 기세를 머금고 있는 월출산 천왕봉이 서 있다. 천왕봉이 내뿜는 불기운을 이 탑이 받아 주고 있다. 160km 강속구를 받아주는 캐처 글러브처럼.

△매일 조선일보에 실린 칼럼 5개가 담긴 뉴스레터를 받아보세요. 세상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91170

[조용헌 건국대 석좌교수·문화컨텐츠학]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