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김하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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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평
내 뼈는 커서 어른이 되었는데
내 속의 아이는 늘 거기서 자라고 있다
풀씨가 자라고 들판이 자라고
눈발 속에서 아버지가 돋아났다
집이 사라졌어도 아이는 늘 거기서 놀고 있다
핏줄이, 모발이, 다 사라져도 아이는 늘 거기서 자라고 있다
뼛가루 같은 햇살 속에 내 뼈들이 묻힌 곳,
내 몸이 점점 작아져서
햇살 속으로 풀밭 속으로 흘러가는 몸
쑥 버덩 속으로 들어가는 몸,
쑥 버덩은 무덤이 되고 혈관이 되어
내 몸 속에서 물레를 돌리고 있다
쑥 버덩의 피를 퍼 올리고 있다
-이영춘(1942-)
이영춘 시인은 봉평에서 출생했다. 여러 시편들을 통해 봉평에 얽힌 기억과 봉평 사람들의 이야기를 아름답고 서정적인 시어로 노래했다. 올해 가을에 펴낸 시집에 실린 시 ‘봉평, 그 눈 길’에서는 “눈 길, 여덟 살 아이 학교 가던 길// 무릎 정강이까지 푹푹 눈이 내려 쌓여// 학교에 가다 되돌아섰던 길// 포롱포롱 눈 속에서 길을 내던// 참새들도 묻히고// 나를 업으러 달려오시던// 할머니도 아득히 묻히고”라고 써서 대설이 내린 날의 어릴 적 일화를 한 편의 동화처럼 들려준다.
세월이 흘러도 유년의 일은 시간의 앨범에 잘 간직되어 있다. 태어난 집의 기둥과 지붕이 무너져서 가옥은 자취가 없어져도 그곳에 어울려 살던 맑은 아이와 순하고 무던한 사람들과 깨끗한 자연은 그때의 얼굴과 표정, 차림으로 그대로 있다. 우리가 언젠가 이 세상에 살지 않게 되더라도 우리의 몸은 그곳의 햇살이 되고, 풀씨가 되고, 들을 이루고, 눈발이 되고, 쑥이 우거져 자라는 높고 평평한 초지가 될 것이다. 소식이 감감하더라도 고향은 현재의 시간에 혈관처럼 흐르고,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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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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