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단 후원회장 이주열 前 총재
50년 전 얘기를 하며 멋쩍게 웃는 이 남자는 ‘난공불락의 한은맨’으로 불렸던 이주열 전 한국은행 총재. 평생 숫자, 통계와 씨름하며 나라 경제를 이끈 그가 은퇴 후 국립극단 후원회장을 맡았다는 소식은 그래서 놀라웠다.
우리는 연극 얘기만 하기로 약속하고 명동예술극장에서 만났지만, 초특급 위기에 처한 나라 경제에 대해서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영하의 거리에 캐럴이 울려퍼졌다.
◇ ‘불 좀 꺼주세요’
-전직 한은 총재가 국립극단 후원회장을 맡아 화제였다.
“뜻밖의 제안이라 무척 당황했다. 물론 처음엔 고사했다. 아무래도 기업인이 맡는 게 낫다는 생각에. 그런데 하루이틀 고민해보니 연극에 대한 아련한 향수가 떠오르더라. 연극의 사회적 가치를 알리기 위해 봉사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극과 인연이 있으신가?
“절친했던 과(연세대 경영학과) 친구가 연극 동아리 멤버였다. 상당히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한 친구인데 연극이 얼마나 좋으면 학점이 바닥을 깔 지경으로 몰입하더라. 그 덕에 연습하는 곳도 가보고 공연도 보면서 연극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어떤 점이 좋았나?
“무대 위 배우들이 내게 직접 속삭이듯 말하고 때로 꾸짖는 듯한 연기에 흠칫흠칫 놀랐다. 동작 하나, 발성 하나도 그냥 나오는 게 아니더라. 저 열정으로 하면 뭘 해도 되겠다 싶을 만큼(웃음).”
-직접 연기를 해보고 싶진 않으셨나.
“연극이라곤 서울 올라와 처음 본 강원도 촌놈이었고,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어야 해서 엄두도 못 냈다.”
-개성 강한 이목구비라 배우를 하셨어도….
“총재 시절 기자회견을 하면 TV 뉴스에 내 얼굴이 나오던데 정말 실망스러웠다. 하하!”
-기억에 남는 연극이 있으신지.
“이만희 선생의 ‘불 좀 꺼주세요’. 제목이 좀 그렇긴 한데(웃음), 90년대 초 대학로를 뜨겁게 달군 작품이다. 산골로 간 여교사와 학교 농장에서 일하는 일꾼의 순수한 사랑 이야기.”
-좋아하는 배우는?
“글쎄, 이호재 선생님? 구수하고도 묵직하면서도 과장 없는 연기가 좋다. 후원회 출범할 때 와주셨는데, 팬이라고 고백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12월 28일까지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상연되는 '사일런트 스카이'. 여성 천문학자 헨리에타 레빗의 이야기를 그린 연극으로 배우 안은진이 열연한다. /국립극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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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컬처’ 떠받치는 기둥
-국립극단에 왜 후원회가 필요한가.
“1950년 창단된 국립극단은 재정의 80%를 정부가 지원하지만 창의적 실험을 한다거나 우수한 콘텐츠를 개발해 해외로 진출하는 데는 여러 제약이 있었다. 국립오페라단, 국립발레단, 국립합창단에도 후원회가 있는데 국립극단에만 없는 것도 안타까웠다.”
-K팝, K드라마처럼 연극도 한류가 될 수 있을까?
“장르의 특성상 디지털 확장성이 떨어지고 언어적 장벽이 높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가 최근 유럽에서 연극으로 제작돼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는 소식에서 희망을 봤다.”
-후원회 발족에 연극인들이 고무돼 있더라.
“연극은 영화, 뮤지컬, 뮤직비디오 등 다른 K컬처를 떠받치는 기둥이다. 기초예술, 순수예술을 활성화하는 데 더 많은 분들이 동참해주시면 좋겠다.”
-돈을 끌어모아야 하는 일인데.
“동창회, 송년회 등 모임이 있을 때마다 나가서 홍보하고 있다. 평생 그런 부탁 안 해봤는데, 열심히 발품을 팔아보려고 한다(웃음).”
8년 연임을 끝내고 퇴임하는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2022년 3월 31일 이임식을 마치고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직원들의 배웅을 받고 있다. /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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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년 ‘한은맨’ 외길
-퇴임 후엔 어떻게 지내셨나?
“나름 분주했다(웃음). 은퇴해도 경제 안팎의 흐름을 놓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경제지표와 한은의 주요 보고서, 해외저널 등을 열심히 들여다본다. 외부 강연도 나가고.”
-여행을 다니셔야지.
“비행기 타는 게 힘들어서(웃음). 재임 시절 각국 중앙은행 모임인 국제결제은행(BIS) 회의를 포함해 IMF 총회, G20 회의까지 1년에 적어도 10번은 출장을 다녀야 했다. 경제 현안을 토론하는 회의의 연속이라 부담이 적지 않았다.”
-박근혜, 문재인 정부에서 총재를 연임했을 뿐 아니라 한국은행 최장기(43년) 근무 기록도 갖고 있더라.
“인생의 거의 전부였다. 퇴임할 때 법정스님 글이 떠오르더라. ‘내가 걸어온 길 말고는 나에게 다른 길은 없었으며 그 길이 나를 성장시켜 주었다.’”
-보수, 진보 두 정권에서 연임한 비결은 뭘까?
“임명장 받기 전까지 대통령들과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는 것?(웃음).”
-역대 가장 큰 위기는 코로나였다고 했더라.
“IMF, 글로벌 금융 위기로부터 교훈을 얻었기 때문에 어떤 위기가 와도 대응할 수 있는 매뉴얼이 내 머릿속에 다 있다고 생각했는데 코로나는 차원이 다른 보건 위기였다.”
-0.5%까지 기준금리를 낮추는 파격 조치를 단행했다.
“실물 경기가 급속도로 위축되고 금융시장이 곤두박질치는 상황에서 대응은 어디까지나 신속하고 과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은이 갖고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금융시장 리스크를 해소하고 중소기업 등 취약 부문을 집중 지원했다. 다행히 1년여 후 경기가 회복세로 돌아서자 선제적으로 금리를 올렸다. 저금리 장기화로 버블(거품)이 생기는 것을 절대 경계해야 하므로. 이 같은 선제적 대응이 높이 평가받아 센트럴 뱅킹사로부터 ‘올해의 중앙은행상’을 받았다.”
-그러나 저금리 정책으로 박근혜 정부때의 가계부채 폭탄, 문재인 정부 때의 집값 폭등을 야기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박근혜 정부 때는 세월호 사고에 메르스 사태까지 겹쳐 내수가 상당히 부진한 상황이었다. 중국 경제마저 부진해 수출이 둔화되고 물가도 낮아 금리 인하가 불가피했다. 문재인 정부 때도 경기 부진과 2% 이하의 낮은 물가로 저금리 기조를 유지해야만 했다. 저금리가 가계부채 증가, 부동산 가격 상승에 영향을 준 건 사실이지만, 경기와 물가 상황을 우선해야 하는 한국은행으로서는 집값 하나만 보고 금리 정책을 펼 수는 없다. 부동산 문제는 수급 조절 등 여타 정책으로 정부가 우선 대응해야 한다.”
-반대로 이창용 현 한은총재는 금리 인하 시점을 놓쳤다고 해서 비판받던데.
“중앙은행은 눈앞의 상황이 아니라 1년 뒤를 내다보고 통화정책을 펼친다. 지금 시점에서 평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문재인 정부의 확장 재정을 우려하며 엄격한 재정준칙을 주장했다가 여당 의원으로부터 ‘너나 잘하세요’라는 조롱을 듣기도 했다.
“가계부채도 중요하지만 나는 국가부채 문제가 더 엄중하다고 본다. 우리 경제가 외환 위기에서 용수철처럼 조기 회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건실한 국가재정이 받쳐줬기에 가능했다. 그런 점에서 GDP의 40% 이내에서 억제됐던 국가부채 비율이 50%로 급증한 것은 두고볼 수 없었다. 그렇잖아도 저출산 고령화로 국가 재정이 급속히 악화되는 상황이라 재정 지출을 엄격히 관리해야 한다고 말씀드린 것이다. 미래 세대에게 자꾸 빚을 떠넘겨서야 되겠는가?”
-저성장 늪에선 벗어날 수 있을까?
“구조개혁 외에는 답이 없다. 자본 투입은 한계에 이르렀고 노동력은 감소하고 있다. 우리 경제의 성장 원동력이었던 자유무역주의도 퇴조하고 있다. 관건은 생산성인데, 이를 높이려면 모든 비효율을 제거해야 한다. 기업이 오직 글로벌 경쟁을 이겨내는 데 전념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정규직 과보호나 주 52시간 근로 같은 고용 시장 규제를 정비해야 한다. 등록금 동결 같은 규제를 놔둔 채 대학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창용 총재는 구조 개혁, 교육 개혁을 공개적으로 주장해 비판을 받았다.
“교육, 노동시장 등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통화정책 수행 여건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한은 총재로서 충분히 던질 수 있는 화두였다고 생각한다. 공론화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지난 12월 9일 오후 서울 중구 무교동 하나은행 딜링룸에서 딜러들이 코스피와 원·달러 환율, 코스닥 지수가 표시된 전광판을 바라보고 있다. 이날 코스피는 올해 처음으로 종가 기준 2400 아래로 떨어졌고, 코스닥은 56개월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전기병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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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핵보다 ‘자국 우선주의’
-계엄, 탄핵으로 위기를 맞은 현재 경제 상황은 어떻게 보시나.
“아직까지는 금융시장과 실물경제가 그런대로 견뎌내고 있지만 정치적 불확실성이 장기화할 경우 우리 경제의 건실한 기초 체력마저 손상될 위험이 있다. 기업의 경영 환경이 지금 얼마나 어려운가. 소비심리마저 얼어붙으면 내수는 더 악화되고, 점점 거세지는 바깥의 통상 압력에 대응하기도 벅찰 것이다. 특히 대외신인도 유지가 중요한데, 탄핵 정국에도 경제 시스템은 정상적으로 작동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어야 한다.”
-박근혜 탄핵 때보다 상황이 안 좋다고 봐야 할까?
“그때는 반도체 경기가 호조를 보였고, 미·중 갈등이 본격화되기 전이었다. 지금은 수출 여건도 나쁘고 내수도 부진한 상황이라 하방 리스크는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정국 불안이 조기에 해소되지 못한다면 어려움은 과거보다 커질 것이고 회복도 상당히 더디게 나타날 것이다.”
-탄핵보다 트럼프 체제의 자국 우선주의가 우리 경제엔 더 타격을 줄 거라는 의견도 있더라.
“자국 우선주의에 따른 수출 환경 악화가 가장 큰 리스크임에는 틀림없다. 미국, 중국, EU 등 우리의 주요 교역 상대국들이 자국의 산업과 일자리를 보호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보조금을 지급하고, 관세를 인상하고 있어 우리 정부가 산업정책의 획기적 전환을 통해 대응하지 않으면 한국 기업만 피해를 보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보조금은커녕 주 52시간 근로 규제 완화 방안이 포함된 반도체 특별법이 상정조차 되지 못했다.
“정치적 불확실성이 경제에 미칠 충격을 최소화하려면 정부와 여야가 합심해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특히 다수당으로서 민주당의 역할이 정말 중요하다. 수권 정당을 표방한다면 정치와 경제는 별개로 접근해야 한다. 기업 경쟁력을 높이고 비효율을 제거하기 위한 정책이 일관성 있게 추진되도록 협력해야 한다.”
-결국 대통령 탄핵으로 국민은 또 한번 상처를 입었다. 우리는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대외 여건이 워낙 어려운 상황이라 걱정이 큰 게 솔직한 심정이다. 정치적 불확실성은 그 강도보다 지속 기간이 경제에 미치는 파급 효과가 더 크다. 정국 불안이 단기에 그치고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 해소될 수 있다는 믿음을 대내외에 보여줘야 한다. 정치권도 국민도,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니라 손을 잡아야 할 때다.”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조선일보와 인터뷰하는 이주열 전 한국은행 총재. 연극에 출연해도 될 만큼 이목구비가 뚜렷하다고 하자 이 전 총재는 두 손을 내저으며 사진기자에게 "'뽀샵'을 잘 해달라"고 부탁했다. / 장련성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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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열
1952년 강원 정선 출생.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립대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77년 한국은행에 입사해 조사국장, 통화정책국장, 부총재를 거쳐 2014년부터 2022년까지 박근혜 정부와 문재인 정부에서 한국은행 총재 및 금융통화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한은 총재 최초로 각국 중앙은행의 협력 기구인 국제결제은행(BIS) 이사회 이사에 선출됐다.
[김윤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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