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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5 (일)

호랑가시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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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포수목원의 완도호랑가시나무 위에 눈이 쌓여 있다. 둥근 잎의 모양새는 감탕나무를, 잎 끝 뾰족한 거치는 호랑가시나무를 닮았다. 천리포수목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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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비 | 천리포수목원 나무의사



나무의사 자격시험 준비를 하려면 대부분 시중에 나와 있는 나무도감을 여러번 훑어보게 되는데, 다양한 수종 중에서도 특히 내 눈을 끈 나무가 있었다. 바로 뾰족한 잎과 붉은 열매로 ‘크리스마스 나무’로도 불리는 호랑가시나무다. 나무도감은 보통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수종을 중심으로 만들어진다. 서양의 나무로 알고 있었던 호랑가시나무가 전라도, 제주도에서 군락을 이루며 사는 자생종이라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호랑가시나무는 감탕나무과에 속하는 자생 상록수다. 감탕나무, 먼나무, 낙상홍 등 감탕나무과에 속하는 많은 나무가 붉은 열매로 한겨울을 밝히는 것처럼, 호랑가시나무도 가을 햇빛에 열매가 익기 시작해 겨우내 정원의 주인공으로 거듭난다. 배수가 잘되고 약간 산성인 토양에서 뿌리를 잘 내리는 호랑가시나무는 사람의 손을 크게 타지 않아 정원에서 가꾸기에도 좋은 수종이다. 정원 경계에 생울타리를 만드는 데에도 적합하고, 그늘에서도 잘 자라기 때문에 햇빛이 잘 닿지 않는 구석에 포인트를 주는 수종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붉은색, 주황색, 노란색 등 색색의 열매는 겨울철 식량이 부족한 새들에게 훌륭한 먹이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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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포수목원의 완도호랑가시나무는 호랑가시나무와 감탕나무의의 자연 교잡으로 생겨났는데, 둥근 잎의 모양새는 감탕나무를, 잎 끝 뾰족한 거치는 호랑가시나무를 닮았다. 천리포수목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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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가시나무는 어쩌다 크리스마스를 대표하는 식물이 되었을까? 기독교에서 호랑가시나무의 뾰족한 잎은 예수의 면류관을, 붉은 열매는 예수가 흘린 피를 상징한다고 한다. 서양에서는 호랑가시나무가 속한 감탕나무과 나무를 통틀어 ‘holly’라고 부른다. ‘홀리 가지로 홀을 꾸미자’(Deck the halls with boughs of holly)라는 구절은 많은 크리스마스 캐롤의 가사로 등장한다.



기독교 등장 이전 호랑가시나무는 풍요의 상징이었다. 고대 켈트족은 찬 바람이 부는 한겨울에도 푸른 잎과 붉은 열매를 선보이는 이 식물을 보고 풍요로운 삶을 빗대어 신성시했다. 고대 로마의 겨울 축제 ‘사투르날리아’에서는 1년의 마무리를 기념하며 호랑가시나무로 만든 꽃장식을 집안 곳곳에 걸었다고 한다. 실제로 붉은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호랑가시나무 울타리 아래를 걷고 있으면, 매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호랑가시나무의 생명력과 풍요로움이 절로 느껴진다.



‘풍향 남동풍, 풍속 강. 습도 52%, 최고 기온 19도, 최저 기온 10도. 하루 종일 심한 강풍이 불어서 지주를 세워주고 온실 등을 보수했다. 호랑가시나무 ‘드와프 버포드’, 유럽호랑가시나무 ‘마담 브리오’ 등 총 76개체의 호랑가시나무를 심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45년 전인 1980년 5월27일 천리포수목원의 작업 일지에 나오는 내용이다. 수목원이 보유하고 있는 호랑가시나무속은 566 분류군에 이르는데, 도입 역사는 수목원이 설립된 197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에서는 일부 남부 지방에서만 자생하지만 해양성 기후 덕분에 겨울에도 비교적 온난한 수목원 곳곳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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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포수목원 추모정원의 풍경. 오른쪽 나무가 붉은 열매를 맺은 완도호랑가시나무다. 천리포수목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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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명에 우리나라의 자생지 지명이 들어간 호랑가시나무도 있다. 바로 1978년 민병갈 수목원 설립자가 전남 완도 지방의 자생식물 탐사 중 처음으로 발견한 ‘완도호랑가시나무’다. 호랑가시나무와 감탕나무의 자연 교잡으로 생겨났는데, 둥근 잎의 모양새는 감탕나무를, 잎끝 뾰족한 거치는 호랑가시나무를 닮았다. 완도호랑가시나무의 씨앗과 가지를 활용하여 번식시킨 ‘천리포’, ‘민병갈’ 등의 재배 품종 역시 미국홀리협회에도 정식 등록되었는데,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천리포수목원은 2000년 아시아 최초로 미국홀리협회가 선정하는 ‘공인 호랑가시수목원’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세상의 온갖 소음에 마음이 시끄러워질 땐 나무와 관련된 기사를 찾아보곤 한다. 지난 2023년 3월, 브라질 식물학자로 구성된 연구팀은 약 200년간 발견되지 않아 멸종된 것으로 여겨진 ‘페르남부쿠 호랑가시나무’ 네 그루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 나무는 플랜테이션과 도시화로 황폐해진 브라질 북동부 이가라수 지역의 아주 조금 남은 숲에서 발견됐다고 한다. 연구팀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오직 초상화로만 봤던 먼 친척을 직접 눈으로 본 듯한 기분이었다.” 발견된 개체가 열매를 맺는지 확인하고 증식시키는 과제가 남아있지만, 사라진 줄 알았던 한 생명체가 여전히 서식지를 지키고 존재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발견이다.



이미 멸종했을지도 모를 존재를 찾기 위해 숲을 헤매다 결국 지구상에 남은 단 네 그루의 나무를 찾아낸 식물학자의 마음처럼, 올바른 직업 정신과 공동체에 대한 관심만이 서로를 구원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연말이다. 다가오는 2025년에는 호랑가시나무 열매처럼 풍요로운 소식이 가득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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