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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6 (목)

지금이 末世라고 주장하는 종말론자들… ‘진짜 최후’는 인류가 서로 연결 끊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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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간 세계 누비며 종말론자 취재

조선일보

종말을 준비하는 사람들

마크 오코널 지음|이한음 옮김|열린책들|336쪽|2만2000원

‘프레핑(prepping)’. 세계 전체가 전면적으로 파멸되기 직전에 와 있다는 확신을 갖고 그런 상황에서 살아갈 준비물, 즉 ‘프렙’을 갖추는 일에 강박적으로 투자하는 일을 가리킨다. 주로 미국 백인들로 구성된 하위 문화다. 이들이 필수적으로 갖추는 아이템은 ‘생존배낭(bug-out bag)’. 사냥칼, 마스크, 전투식량 등 야생에서 자신을 지키는 데 꼭 필요하다 생각한 물품들이 들어 있다.

프레퍼들은 핵공격, 대규모 사회 불안, 바이러스의 세계적 유행, 운석 충돌 등 세상의 종말을 불러오는 최악의 사건들이 도시 환경에 집중될 것이라 상정한다. 그래서 ‘SHTF(shit hits the fan)’, 즉 ‘수습 불가능한’ 상황에서 해야 할 일이 집을 버리고 비교적 안전한 야생으로 향하는 것이라고 본다.

‘종말 이후 생존 판타지’를 지탱하기 위한 다양한 도구와 식료품 수요를 중심으로 소규모 경제가 형성돼 번성 중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회사가 ‘누만나(NuManna)’. 구약에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신이 선사한 음식인 ‘만나’에서 이름을 따 왔다. 오트밀, 콩과 쇠고기, 체더 치즈 브로콜리 수프, 냉동 건조 닭고기를 섞은 파스타 프리마베라 등 유통기한이 25년에 달하는 동결 건조 분말 식품들을 커다란 통으로 판다.

종말론을 퍼뜨리는 몇몇 프레퍼 유튜버들은 종말 이후의 세상에서 약탈이 만연하고 법과 질서가 전면적으로 붕괴하는 ‘시민 소요 사태’가 발생할 거라 이야기한다. 이들이 그리는 세계에서 무법 사태를 주도하는 인물들은 보통 흑인 등 유색인종 남성이다. 저자는 말한다. “프레퍼는 두려움에 준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환상에 대비하고 있는 것이다.”

서부 개척 시대, ‘야만’으로 상징되는 미국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영토를 차지했던 ‘강인한 남성성’에 대한 향수, 가정을 요새 삼아 아버지가 폭력을 솜씨 있게 휘두르던 가부장제 시대로의 회귀 욕망이 프레퍼들의 동력이라는 것. 저자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트럼프의 구호 역시 “상상 속의 아메리카 변경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현실 도피적 환상을 계속 유지하려고 애쓰는” 프레퍼 집단과 맞닿아 있다고 해석한다.

아일랜드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1년간 미국, 뉴질랜드, 스코틀랜드, 우크라이나 등을 누비며 세상의 끝이 도래할 것이라 확신하는 이들을 취재했다. 저자 역시 2016년 말 기후 재앙, 좌우가 극단으로 양분된 세계 정치 지형, 민주주의의 파괴, 부(富)의 양극화 등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종말의 징후를 읽었다. 둘째를 낳을까 고민하면서 저자는 이런 세상에 또 한 명의 아이를 더 세상에 내보내는 행동이 ‘윤리적 실수’가 아닐까, 수없이 자문한다. 이 책은 그 물음에 대한 결과물이다.

어떤 이들이 또 종말을 믿는가. 미국 부동산업자 로버트 비시노는 사우스다코타주 초원에 2차대전 때의 군수품 보관 시설을 벙커로 개조해 ‘생존 대피소 공동체’를 건설하고 있다. 비시노는 이 지하 대피소를 세상의 종말이 와도 이전처럼 안락한 생활을 누리려는 부유한 이들에게 2만5000달러(약 3579만원)에 분양할 계획이다.

과학적 이성으로 무장한 이들도 예외는 아니다. 페이팔 공동 창업자 피터 틸, 샘 올트먼 오픈AI CEO 등 실리콘밸리 초갑부들은 뉴질랜드 오클랜드에 땅을 매입해 합성 바이러스 유출, AI의 폭주, 핵 무장 국가들 사이의 자원 전쟁 등 전면적인 붕괴 시나리오에 대비한다. 저자가 스코틀랜드의 알라데일 야생보호구역에서 만난 단체 ‘검은 산 프로젝트’는 “기후 재앙은 현실이자 불가피한 기정사실”이라면서 인간이 생활 방식을 바꾸면 기후변화로 일어날 최악의 상황을 막을 수 있다는 환경론자들의 주장을 ‘망상’이라 규정한다.

그렇지만 세상의 끝에도 희망은 있다. ‘검은 산 프로젝트’의 한 여성은 저자에게 말한다. “머지않아 모두 사라질 거예요. 그래도 괜찮아요. 그 뒤에 자연이 다시 출현해 회복될 것이고, 그 자연은 아름다울 거예요. 나는 내게 남은 삶을 즐기고 싶어요. 좋은 씨앗을 뿌리고 싶어요.”

지금 우리 사회의 풍경은 그 어느 때보다 황폐하고, “정녕 말세(末世)”라는 한탄과 한숨으로 뒤덮여 있다. ‘이 세계를 아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라는 저자의 물음은 결국 우리에게도 주어진 과제일 것이다. 세상의 최후를 찾아 나선 여정을 통해 저자는 깨닫는다. 진정한 인류의 종말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타인에 대한 의무를 저버리고 연결을 해체하며 자신만 살고자 하는 이기적 결정에서 온다는 것을. 원제 Notes from an Apocalypse.

[곽아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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