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시위 현장의 폴리스 라인.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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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전 공항 가는 길에 차가 극심하게 막혀 오랫동안 도로 위에 발이 묶였다. 평일 오후였고 러시아워 시간도 아니었는데 알고 보니 시청 근처 시위로 도로가 통제된 탓이었다. 공항에서 여유 있게 시간을 보내려던 계획은 당연히 물거품 됐고 간신히 비행기를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주말 저녁엔 아내와 아이와 함께 광화문에 식사를 즐기러 갔다. 아뿔싸, 가지 말았어야 했다. 정치적 입장이 극명하게 다른 두 집회가 서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무대 위 마이크를 잡은 이들의 날카로운 목소리와 날 선 발언들이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질 때면 소리의 볼륨이 가슴 안에서 물리적으로 둥둥 울리는 게 느껴질 정도로 컸다.
간신히 귀를 막고 길을 걷던 아내가 경찰관에게 집회 스피커의 지나치게 큰 볼륨에 대해 뭔가 조치가 가능한지 물었다. 경찰관의 얼굴에 잠시 인간적인 표정이 스쳤다. “사실 저희도 힘드네요.” 그에 따르면, 이 정도의 볼륨은 물론 불법이지만, 집회 주최 측이 스피커를 계속 옮겨 다녀 데시벨 측정 장비가 소음을 기록하지 못해 조치가 힘들다고 했다.
기자 시절엔 한국의 집회 문화를 긍정적으로 보고, 민주주의의 안전망 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뭔가 달라진 것처럼 느껴진다. 대규모 집회가 이제는 참을 수 없는 부당함이 발생했을 때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불만을 표현하려는 수단으로, 그것도 서울 중심을 지나는 수만 명의 사람들에게 아무런 배려 없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선입견일 수 있지만, 요즘 광화문과 시청에서 벌어지는 이런 방식의 집회들은 시민들의 의견을 바꾸기보다, 타인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강제로라도 들려주고 싶다는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에 가까워 보인다. 코로나 이후 공동체 의식은 점차 사라지고 있고, 누군가에게 중요한 존재임을 인정받을 계기도 줄어드는 현실에서 집회를 통해 소속감과 의미를 찾는 것인가.
광화문에서 집회 소음을 피해 창문을 올릴 때마다, 지친 얼굴로 집에 도착할 때마다, 집회 참가자들이 그런 소속감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충족할 수는 없을까 혹은 집회 라인 바깥의 사람들 마음까지 움직일 수 있도록 더 나은 배려를 할 순 없을까, 생각하게 된다.
[다니엘 튜더·전(前) 이코노미스트 한국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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