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령과 마약
이관형 지음|실레북스|440쪽|2만9000원
‘전(全)국토의 백도라지화.’ 1980년대 말 북한은 김일성·김정일 부자가 지시한 ‘백도라지 사업’으로 들썩였다. ‘백도라지 사업’은 아편의 원료가 되는 양귀비 재배 확대 사업을 뜻한다. 그런데 왜 북한은 양귀비를 양귀비라 부르지 못했을까? “김일성과 김정일이 양귀비 재배 사업을 ‘백도라지’ 사업으로 명명한 이유는 보안 때문이었다. 즉 국가 주도 범죄가 발각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김일성 치하에서 시작된 북한의 마약 산업이 김정일, 김정은 체제로 이어지는 80년 동안 어떻게 변화하고 유지되었는지 파고든다. 북한의 마약 범죄는 당국자의 일탈이나 민간 범죄조직의 소행이 아닌 ‘수령에 의한, 수령을 위한, 수령의 범죄’라 주장한다. 저자는 고려대에서 ‘북한 마약 문제 연구’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북한인권 시민사회단체 NK워치에서 북한의 반인도적범죄 조사 책임을 맡고 있다.
국내외 전문가들은 북한 당국의 마약 밀매는 1970년대 시작되었고, 2000년대 중반을 전후로 중단됐거나 줄어들었다는 주장을 펼쳐 왔다. 그러나 저자는 그 주장을 일축한다. 북한 당국 주도의 마약 범죄는 1945년 시작되었고, 현재도 진행 중이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 전망한다.
저자는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이 1920년대 중강진에서 처남에게 아편을 공급받아 팔았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김일성은 유년 시절부터 부친과 외삼촌의 아편 장사를 일상처럼 봐 왔고, 일제의 아편 생산지인 만주에서 청년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마약이 돈이 된다는 것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 또한 마오쩌둥의 영향으로 마약을 미국과 서방세계를 향한 공격 무기라 여겨, 1945년 정권 장악 직후부터 남한 파괴와 침략을 위해 38선 이남으로 대량의 마약을 주입했다는 것이다. “한 국내 연구자는 1950년 전후(前後) 한국 사회의 간첩-마약 담론 확산 이유를 이승만 정부의 정치적 경쟁 세력들에 대한 감시와 견제 정당화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 그런데 마약은 이승만 정부가 무(無)에서 창조한 반공 도구가 아닌 김일성의 적화 도구였다.”
저자는 “북한산 마약의 한국 침투 역사는 80년을 바라보고 있다”면서 “최상급 북한산 필로폰은 극소량으로도 빠른 중독 효과가 있다”고 말한다. /일러스트=박상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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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남한에 침투시킨 마약은 남파 공작원들의 자금줄이 됐고, 마약중독자를 양산해 사회를 취약하게 하는 용도로 활용됐다. 한 예로 남로당 조직부장 이중업은 1949년 검거되기 전까지 북한에서 주문진과 포항으로 매월 10kg의 마약을 공급받아 매달 약 1000만원의 활동자금을 마련했다. 6·25 직전 한국의 마약 중독자는 전체 인구의 약 1.5%를 차지했는데, 이 수치는 2023년과 비교했을 때 3배가 높다. “한국은 이러한 상황에서 전쟁을 맞이했고 김일성은 그 누구보다 마약의 파괴력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북한은 1960년대 초반까지 남파 공작원을 통해 마약을 밀어넣다가 박정희 정권이 반공 및 마약 통제정책을 강화하면서 홍콩, 동남아, 일본 등을 경유한 우회 루트를 활용한다. 김정일 정권 때는 일본 야쿠자들에게도 마약을 팔았다. 김정은도 마약 생산과 밀매에 박차를 가했다.
저자는 김정은이 고모부 장성택을 처형한 이유 중 하나도 마약이라고 본다. 장성택은 김정일로부터 마약산업을 위임받아 외화벌이를 책임져 왔다. 김정은은 장성택에 대해 “사상적으로 병들고 극도로 안일해이된 데로부터 마약을 썼다”고 말했는데, 김정은이 언급한 ‘장성택의 마약 사용’이 장성택이 보유한 마약산업 이권을 자신에게 바치지 않았다는 뜻으로 읽힌다는 것이다. 현재 북한은 아프리카, 중국, 동남아 등지에 단기간에 1톤의 마약을 생산할 수 있는 시설인 ‘메가랩’을 최소 10개 이상 두고 있다. “북한의 필로폰 생산 역량은 연간 100~200톤 수준도 아닌 상상 그 이상의 천문학적인 단위일 수도 있다.”
저자는 20년 넘게 탈북민을 인터뷰하고 북한 관련 데이터를 수집해 왔다. 그간 쓴 논문들을 바탕으로 한 이 책에 풍부한 현장 경험이 묻어나는 이유다. “국내에 유통되고 있는 북한산 마약 문제는 단순 범죄가 아니라 안보 범죄로 경계해야 한다”면서 이른바 ‘검수완박’으로 검찰의 마약 수사권이 대폭 축소된 현실을 우려한다. 마약은 ‘한국의 조용한 자멸을 원하는’ 수령의 혁명도구라 여전히 간첩들이 북한산 마약과 연계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요즘 시대에 간첩이라니, ‘철 지난 색깔론’쯤으로 치부할 이들에게 중앙당 선전선동부 산하 김일성김정일기금위원회에서 기금을 관리했던 한 탈북민이 저자에게 들려준 말을 전한다. “수백 명의 한국인들이 북한에 충성헌금을 바쳤다.”
[곽아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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