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29 (금)

상법개정 반대 ‘궤변’, 1400만 투자자가 바보인가 [아침햇발]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김창범 한국경제인협회 부회장이 지난 11월21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한국경제 재도약을 위한 주요 기업 사장단 긴급성명’을 발표하며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기존 ‘회사’에서 ‘총주주’로 확대하는 상법 개정에 반대하고 있다. 이날 발표에는 삼성, 현대차, 에스케이, 엘지 등 국내 주요 16대 그룹 대표들이 참석했다. 한국경제인협회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곽정수 |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한겨레



그야말로 총력전이다. 상법 개정에 반대하는 재계를 두고 하는 말이다. 최근 더불어민주당이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기존 ‘회사’에서 ‘총주주’로 확대하는 상법 개정안을 당론으로 채택한 뒤 사실상 전면전 양상이다. 경제단체 공동성명, 토론회와 포럼, 전문가 기고로 여론전을 펴더니, 급기야 국내 16개 대표 기업의 사장단이 긴급성명까지 냈다. 삼성·현대차 등 4대 그룹을 망라해서 기업들이 직접 전면에 나선 것은 2015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이후 9년 만이다. 법 개정으로 인해 지배주주들이 포기해야 할 ‘기득권’이 그만큼 크다는 얘기이다.



인터넷 댓글로 보면, 법 개정에 찬성하는 여론이 압도적이다. 한국 증시와 투자자는 사실상 빈사 상태이다. 기업 분할합병이나 증자, 계열사와 거래(일감 몰아주기)를 할 때 지배주주의 이익이나 경영세습을 위해 일반주주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끊이지 않는다. 올해만 해도 두산의 분할합병과, 고려아연의 일반공모 유상증자가 일방적으로 추진됐다. 일반주주와 금융당국의 제지로 모두 백지화했지만, 투자자들로서는 분통이 터질 일이다.



이런 후진적 기업지배구조가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증시 저평가)의 핵심 원인이라는 것은 이제 상식이다. 그동안 사외이사제, 감사위원 분리 선출 등의 개선 노력이 있었지만, 근본 변화를 끌어내지 못했다. 실망한 투자자들은 아예 한국 증시를 떠나고 있다. 그런데도 재계는 자성은커녕 “기업의 발목을 잡으려 한다”고 억지를 부린다. 투자자에게 사과한 두산도 긴급성명에 버젓이 참가했으니, 재계의 인식 수준을 짐작하게 한다. 증시가 무너지면 기업의 자금조달 통로도 막힌다. 상법 개정 반대는 증시를 살리고. 투자자를 돌아오게 할 기회를 재계 스스로 걷어차는 짓이다.



재계는 소송 남발 우려를 내세운다. 수많은 주주의 생각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모든 주주의 이익을 충족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한다. 얼핏 들으면 그럴듯해 보인다. 하지만 법 개정 취지를 제대로 모르거나, 알면서도 일부러 헐뜯으려는 불순한 의도가 의심된다. 개별 주주의 이익을 모두 충족하자는 게 아니다. 회사보다 주주 이익을 우선시하자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지배-일반주주 간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사안에서 일방적으로 지배주주만 유리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해외 투기자본 위협론도 요란하다. 기업 이사회가 장악되고, 먹튀가 예상된다고 한다. 이 또한 호들갑이거나, 궤변에 불과하다. 대법원에서 이미 유죄 판결을 받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관련 뇌물공여 사건의 교훈을 벌써 잊었는지 묻고 싶다. 2015년 투자자들은 삼성물산에 일방적으로 불리한 합병 비율에 반발했다. 한겨레는 합병 계획을 취소하고, 시장이 수용할 수 있는 조건으로 추후 재추진하는 대안을 권했다. 하지만 삼성 미래전략실의 최고재무책임자(CFO)는 그럴 경우 경영권이 외국 사모펀드에 넘어갈 것이라며, 금융 상식에 반하는 억지를 부렸다. 결국 합병을 강행한 삼성은 ‘사법 리스크’라는 수렁에 스스로 뛰어든 꼴이 됐고, 그 비극이 8년째 이어지고 있다.



보수언론은 재계의 궤변을 따끔하게 비판하기는커녕 나팔수 노릇에 급급하다. 신기술 투자, 인수합병으로 단기적으로 손실이 나거나 주가가 떨어져도 소송 위험이 크다는 거짓말을 눈 하나 깜짝 않고 한다. 9년 전에도 투자자 우려에 귀를 막고, 삼성 합병에 찬성하더니, 개전의 정이 전혀 없다. 최근에는 법 개정 취지에 찬성한 대법원까지 공격하는 막장을 보인다. 대법원은 미국 등 여러 나라가 주주 충실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법 개정이 법리에 어긋나고, 해외 사례도 없다는 재계의 억지 주장이 무너졌다. 이를 제대로 검증도 없이, 받아쓰기만 한 보수언론은 얼굴을 들 수 없게 됐다. 하지만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대법원을 향해 “사법의 정치화”라며 극언을 퍼붓는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했던가? 기자 월급이 대형 광고주에게서 나오는 구조 탓이다.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도 별반 다를 바 없다. 최근 김병환 금융위원장은 “상법 개정은 부작용이 많아 신중해야 한다”고 했다. 연초 법 개정 추진 뜻을 밝힌 윤 대통령과 반대되는 얘기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수차례에 걸쳐 법 개정 필요성을 역설해온 것과도 배치된다. 정부가 재계 눈치를 보며 우왕좌왕하다 보니, 정책 혼선을 자초한다.



올해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다론 아제모을루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는 모두를 끌어안는 포용적인 제도는 발전과 번영을 불러오고 지배계층만을 위한 수탈적이고 착취적인 제도는 정체와 빈곤을 낳는다고 분석했다. 소수 지배주주의 이익을 위해 일반주주의 이익을 부당하게 해치는 게 바로 착취 아닌가. 국회가 여러 이해관계자와 전문가의 의견을 경청하는 것은 필요하다. 하지만 상법 개정이 경영에 부담을 준다는 억지, ‘기업 죽이기 법’이라는 궤변, ‘트럼프 위기론’을 앞세운 위협에 더는 현혹돼선 안 된다. 김남근 민주당 의원은 “상법 개정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한국 증시의 현실이 너무 절박하다. 여야 모두 정기국회가 증시 붕괴를 막기 위한 마지막 기회라는 각오를 가져야 한다. 증시는 소수 지배주주들의 놀이터가 아니다. 1400만 투자자는 바보가 아니다.



jskwak@hani.co.kr



▶▶세상의 모든 책방, 한겨레에서 만나자 [세모책]

▶▶핫뉴스, ‘한겨레 텔레그램 뉴스봇’과 함께!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