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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8 (목)

시국선언을 다시 읽으며 [세상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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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경북대학교 교수·연구자’ 179명의 시국선언이 경북대 북문 조형물에 붙어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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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원 |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교수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겨우 절반 남짓 지났을 뿐인데, 전국의 대학에서 시국선언이 쏟아지고 있다. “요즘은 더 이상 캠퍼스에 대자보가 붙지 않는다”며 한탄하던 때가 엊그제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제는 하루가 멀다 하고 학생들이 실명으로 대자보를 쓰고, 이어서 다른 학생들이 포스트잇으로 ‘답글’을 남긴다. 한겨레 집계로 지난 21일 기준 전국 30개 대학·지역의 3400여명 교수·연구자가 시국선언에 참여했다. 이후로도 시국선언과 학생들의 대자보는 계속 번져가고 있다.



물론 대학가의 시국선언이 대단히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교수들의 발언이라고 해서 더 무게감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우리 모두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누구나 사회 정의를 위해 자기의 몫을 수행해야 할 책무가 있고,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그 부름에 응답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다른 경로로 부패와 부정의에 맞서 싸우고 있으며, 또한 자신의 생존을 걸고 치열하게 투쟁하고 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대학이 항상 사회 변혁의 최일선에 서 있는 것도 아니다. 한때는 상징적 역할을 넘어 실질적 기여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회 변혁을 추동하는 담론이 어떻게 생산되는지를 되짚어보면, 요즘의 한국에서는 대학의 역할이 점점 작아지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에 남아 있기를 선택했다면, 양심 있는 지식인들은 “권력 앞에서 진실을 말해야” 한다. 단순히 교수들은 특권층이므로 다른 이들보다 더욱 커다란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는 해묵은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제도권 학계에 남아 있기를 선택했다면, 즉 지식-권력 생산의 심장부에 남아 있다면, 바로 그 자리야말로 가려진 진실을 폭로하고 설명할 수 있는 곳이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는 뜻이다. ‘제도권 학계’라는 지식-권력 생산 체계에 들어찬 모순과 부조리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일, 그리고 압력을 가하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일은 내부에서 끊임없이 싸우는 이들과 함께 하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학이 어떻게 다른 기관들과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의 논리를 따라 운영되는지, 어떻게 한 사회의 지배적·억압적 사유와 규범을 재생산하는지, 그리고 교육의 장 속에 어떻게 폭력과 차별이 개입하는지 외면하지 말아야 할 책무는 바로 대학에 속한 지식인들에게 있다. 다른 모든 조직이 그렇듯이 대학은 차별과 불공정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며, 때로는 학문의 이름으로 지배 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확산시키기도 한다. 고통받는 동료와 학생을 위한 증인이 되는 일, 비정규직 강사들과 연대하는 일, 시장 논리에 병들어가는 대학을 구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목소리를 내는 일, 학문적 발견이 전쟁과 폭력에 도용되지 않도록 힘쓰는 일. 이렇게 지식-권력 생산 체계의 모순과 부조리에 저항하는 일도 교수들이 해야 할 일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권력 앞에서 진실 말하기”는 “권력의 심장부에서 진실 말하기”로 고쳐 써야 할 것이다. 심장부에서 솟구치는 비판은 그만큼 강력한 물줄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지금은 이런 글을 쓰고 있지만, 실은 이를 진정으로 깨닫고 실천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지식 생산’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능력주의 논리를 당연하게 여겼고, ‘조직 연구자’라는 직업이 어떻게 신자유주의적 발견을 존속시키는지 직시하지 못했다. 이는 결국 일종의 ‘정상성’을 만들어내는 폭력과 배제의 시스템이다. 그래서 나는 다른 선구자들을 따라 권력의 심장부를 향해 진실을 말하는 것이 지식인의 일이라고 굳게 믿게 되었다.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지식인의 책무이듯이, 내가 속한 공동체의 정의를 실현하는 일도 나의 책무가 아닐까.



그러므로 시국선언은 지식인으로서 낼 수 있는 최소한의 목소리다. 부끄러운 이름으로 남지 않으려는 지식인들이 나라의 위기와 퇴행을 걱정하며 목소리를 냈다면, 마찬가지로 이들은 학계의 위기와 퇴행을 근심하며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특권에 굴복한 이들이 “나는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 미처 몰랐다”고 발뺌할 수 없도록 계속해서 진실을 말하는 것이 우리의 삶과 공동체를 더 낫게 만드는 길의 출발점이다. 아마도 그런 변화의 길을 내는 사람들은 “나는 폐허 속을 부끄럽게 살고 있다”고 먼저 고백한 양심적인 지식인들 중에서 나타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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