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임영웅의 ‘리사이틀’(RE:CITAL) 콘서트를 예매하는 모습.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지난 20일 저녁 8시, 20만명이 기다린 ‘그때’가 당도했다. 가수 임영웅이 고척스카이돔에서 여는 ‘리사이틀’(RE:CITAL) 콘서트 예매가 개시되는 시각이다. 팬카페 회원들은 며칠 전부터 ‘비법’을 은밀히 공유했다. “한적한 동네 피시(PC)방에 가라”, “반복 연습이 필요하다”, “다른 와이파이는 모두 꺼두라”. ‘피케팅(피가 튀길 정도로 치열한 티케팅)’을 앞둔 임영웅 팬과 가족들은 공지가 올라온 지난달 6일 이후 초긴장 태세를 유지했다.
예매 개시 1시간 전. 야근인 탓에 피시방에 갈 여력이 없었다. 회사 사무실에서 휴대전화를 켜고 준비운동에 들어갔다. 다른 모든 프로그램의 실행을 종료하고, 데이터 상태를 확인했다. 본인 인증 완료는 물론 미리 해뒀다. 다른 공연 예매를 결제 직전까지 진행하며 예행연습까지 마쳤다.
‘남은 시간 01:00’. 곧 ‘예매하기’ 글자가 적힌 보라색으로 바뀔, 남은 시간을 알리는 단추 속 숫자가 빠르게 줄었다. 파르르 떨리는 검지손가락을 괜히 휴대전화 화면에 댔다 떼었다. 부모님이 간절히 바라는 티켓이다. 연말 효도의 성패가 0.01초 만에 결정된다. 3, 2, 1. 빛에 버금갈 속도로 ‘예매하기’를 눌렀다.
‘나의 대기 순서’가 나타났다. 2만1578번이다. 선방했다. 전체 대기자가 16만504명이니, 14만명의 경쟁자를 제친 셈이다. 슬며시 들떴다. 대기 순서는 차차 줄었다. 저녁 8시18분 드디어 좌석을 선택할 차례가 됐다. 남은 ‘포도알’(다른 사람이 선택하지 않아 비어있는 좌석)을 빠르게 주워야 했다. 이성보다는 본능으로, 듬성듬성 보인 좌석을 클릭했다. 결제창으로 넘어가고 ‘결제’를 클릭한 순간. 모든 것이 무위로 돌아갔다.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사무실에서 숨죽여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오류가 발생했다”는 쉬운 문장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망연히 한참을 멈춰있다가, ‘뒤로 가기’ 버튼을 눌렀다. 원점부터 시작이다. 대기 순서는 ‘20만번’이 됐다. 예매 성공엔 턱도 없는 대기 순서다. 결제 수단을 점검하지 않은 게 패착이었다. 임영웅 콘서트 티케팅은 그렇게 실패기로 남았다.
대기 순서가 끝나고 빠르게 좌석을 선택했으나, 결제 단계에서 실패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
그야말로 ‘광클 사회’다. 맛집 예약, 콘서트·공연 예매, 팝업 행사, 명절 기차표, 골프장 예약, 마라톤 신청, 중고나눔까지. ‘빛의 속도’로 ‘클릭’하지 않으면 가고 싶은 식당을 가지도, 물건을 사지도, 달리지도 못한다. 지난달 프로그램 흑백요리사 우승자 ‘나폴리 맛피아’ 식당 예약에는 11만명이 몰려 예약 앱이 먹통이 됐다. 지난 9월 일본 캐릭터 판매점 ‘나가노마켓’ 팝업 스토어 입장권을 얻기 위한 온라인 사전 예약엔 접속자 18만명이 몰렸다. 지난 12일 고양 하프마라톤도 신청자가 한꺼번에 몰리자 서버가 마비돼 접수 일정을 수차례 연기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용병’을 자처하는 이들도 생겼다. ‘손이 빠른’ 경험을 살려 ‘대리 예매’를 해주는 이들이다. 특히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중장년층은, 자녀와 지인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 임영웅 콘서트 티케팅에 성공한 40대 직장인 ㄱ씨는 “예매 사이트의 특성과 순서를 알고 있기 때문에 0.1초의 고민도 없이 다음 단계로 건너갈 수 있는 노하우가 있다”며 “나훈아·조용필 콘서트 티케팅에 성공해 지인들의 ‘대리 효도’를 도왔다”고 했다. 엑스(X·옛 트위터)엔 일정한 비용을 받고 대리 티케팅을 해주는 계정들도 있다. 대리 티케팅을 부탁할 여윳돈, 티켓 전쟁 참전을 함께해 줄 인맥마저 중요해진 것이다.
신청자가 몰려 서버가 마비된 고양 하프마라톤의 접수 연기 공지. 누리집 화면 갈무리 |
이를 악용한 범죄도 있다. ‘매크로 프로그램’을 이용하거나 예매·신청 사이트를 교란하는 식이다. 매크로 프로그램을 이용해 임영웅 콘서트 티켓 등을 손쉽게 구한 뒤, 이를 중고거래로 판매해 1338만원을 벌어들인 대학생 등이 최근 경찰에 붙잡히기도 했다. 인위적인 ‘광클’에 기댄 장사꾼이 늘어나면서 인기 공연 암표 가격이 수백만원대로 치솟자, 정부는 지난 3월 공연법을 개정해 공연 예약에 ‘매크로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처벌하기로 했다.
‘광클’은 신청·예약·구매 대부분의 활동이 온라인으로 이뤄지는 초연결사회의 결과물이다. 일각에선 ‘추첨제’나 ‘오프라인 대기’로 방식을 전환하자는 주장도 한다. 노인들이 많이 수강하는 문화센터 강의 신청 방식을 예전처럼 ‘아침 일찍 줄을 서는 순서대로’ 받는다거나, 인기 마라톤 대회는 추첨을 통해 참가자를 뽑자는 식이다. ‘단 한 번, 1초’에 달린 클릭으로 문화·소비 생활이 좌우되는 것이 부당하다는 취지다. 이번 임영웅 콘서트 예매는 하나의 계정으로, 하나의 대기열 순번만 받을 수 있도록 제한하며 동시 접속을 막으려 했다.
박창호 숭실대 교수(정보사회학)는 이를 ‘속도에 기울어진 사회’라고 표현했다. 박 교수는 “빠르게 하는 것이 곧 능력이고, 이를 통한 결과가 정당하다고 여기고 있다”고 지적했다. 각자 처한 상황이나 필요를 반영하지 못하는 경쟁적인 자원 배분을, ‘광클도 능력’이라는 식으로 합리화하게 되었다는 의미다. 온라인에 서툴거나, 동원할 지인이 없는 이들은 소외될 수밖에 없다. 박 교수는 “오프라인 신청을 병행하거나 여러 번의 기회를 나눠서 주는 등 ‘광클’로부터 소외된 이들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가윤 기자 gayoon@hani.co.kr
▶▶세상의 모든 책방, 한겨레에서 만나자 [세모책]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