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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 (금)

나랏일에 책임을 진다는 것 [박찬승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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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에 반대하여 1905년 11월30일 자결 순국한 민영환.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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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승 | 한양대 사학과 명예교수



지난 11월17일은 순국선열의 날이었다. 이날은 원래 1905년 11월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된 날로서 한국인에게는 치욕의 날이었다. 그런데 1939년 11월21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은 지청천·차리석 의원 등의 제안으로 11월17일을 ‘순국선열기념일’로 제정하였고, 임시정부 국무회의는 1940년 2월1일 이를 공포하였다. 치욕의 날에 순국선열의 뜻을 계승하여 더욱 분발하자는 의미였을 것이다.



해방 이후에도 해마다 11월17일에 광복회, 순국선열유족회 등 여러 독립운동 관련 단체, 혹은 정부 주관으로 ‘광복선열추모식’이 열렸다. 1997년 이들 단체의 요청에 따라 정부는 ‘순국선열의 날’인 11월17일을 법정기념일로 지정하여 이때부터 정부 주관으로 행사를 치르게 되었다. 정부 수립 49년 만의 일이었다.



‘순국선열’이란 일제의 국권 침탈 전후로부터 국권 회복과 독립을 위해 일제와 싸우다가 절사(자결 순국), 전사(전투 중 사망), 형사(사형을 받아 죽음), 피살(죽임을 당함), 옥사(감옥에서 사망), 옥병사(감옥에서 얻은 병으로 사망)한 분들을 일컫는다. 순국선열유족회에서는 순국한 이들의 수가 약 15만명이며, 이 가운데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이는 3500여명이라고 한다.



이 글에서 특히 주목하고자 하는 이들은 1905년 을사늑약 이후 1910년 강제병합 직후까지 자결 순국한 분들이다. 1905년 을사늑약 직후에 14명, 1907년 정미조약 직후에 4명, 1910년 강제병합 직후에 44명으로 모두 62명이 자결 순국했다. 자결 순국한 이들은 전현직 관료, 양반 유생, 군인들이 대부분이지만, 일반 평민도 있다.



이들 가운데 가장 저명한 이는 을사늑약 직후에 자결한 충정공 민영환이다. 그는 여흥 민씨 민겸호의 아들로 태어나 큰아버지인 민태호에게 입양되었다. 민태호는 고종의 외삼촌이었다. 민영환은 민씨 가문의 배경을 등에 업고, 젊어서부터 정계의 주요 인물이 되었다.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던 젊은 세도가 민영익이 청국으로 망명한 뒤, 민영환은 민씨 가문의 중심인물이 되어,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쳤다. 그는 고종의 측근으로서, 1896년 아관파천 이후에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축하사절로 가게 된다. 당시 그는 일본-미국-유럽을 거쳐 러시아의 모스크바에 갔다. 또 1897년에는 영국 여왕 즉위 60주년 축하식에 참석하기 위해 영국에 다녀오기도 했다. 러시아와 영국을 다녀온 뒤, 그는 점차 개화와 개혁의 사고를 갖게 되었고, 재야의 개혁파인 이준 등과도 연결을 가졌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난 이후에는 학부대신, 의정부 참정대신, 시종무관장 등을 차례로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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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11월17일 을사늑약이 맺어진 덕수궁 중명전. 국가유산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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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11월17일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일본의 보호국 신세로 전락했다. 당시 시종무관장이던 민영환은 11월26일 전 의정대신 조병세를 비롯한 70명이 고종에게 올린 “조약에 찬성한 5대신을 처형하고, 조약을 파기할 것을 촉구”하는 상소에 동참하였다. 조병세가 대궐 밖으로 추방당하고 감금되자, 민영환은 11월28일 이번에는 자신이 대표가 되어 고종에게 상소를 올렸다. 그는 “아직 고종과 참정대신 한규설의 인준이 없으니 조약은 무효라고 주장하고, 다시 일본과 담판하여 조약을 파기하라”고 촉구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물러가라’는 말밖에 하지 않았다. 이에 그는 같은 날 다시 상소를 올렸다. 그는 “을사오적은 당연히 베어야 한다. 당연히 베어야 할 것을 베고, 주무대신을 새로 임명하여 문제의 조약을 폐기하는 방법을 도모”해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고종은 민영환과 상소를 같이 올린 이들을 법부에서 모두 잡아다가 다스리라고 명령했다. 민영환은 평리원에 끌려갔으나 고종의 명으로 곧 석방되었다.



이후 민영환은 사세가 틀렸다고 보고, 죽음으로써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 국민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11월29일 그는 집으로 돌아와 유서를 작성하고, 30일 새벽 자신의 방에서 방문을 걸어 잠그고 칼로써 자결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45살이었다. 민영환의 순국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이들이 조문을 왔고, 고종도 특별히 애도하는 조서를 내렸다.



민영환은 유서에 이렇게 썼다. “아아!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이에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경쟁에서 소멸할 것이다. 대저 살려고 하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을 것을 기약하면 살게 되는 것이니, 제공은 어찌 이를 모르는 것인가? 영환은 그저 한번 죽는 것으로 황제의 은혜에 보답하고, 또 우리 2천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그는 주요 관직에 있었던 자로서, 국권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국민에게 사죄하고자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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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의 자결 소식을 듣고 이튿날인 12월1일 자결 순국한 조병세. 위키미디어 코먼스


민영환이 자결한 다음날인 12월1일, 그와 함께 첫 상소를 올렸던 조병세는 민영환의 자결 순국 소식을 듣고 경운궁에 나아가 다시 상소문을 올렸다. 그리고 군인들에 의해 강제로 가마에 실려 조카인 조민희의 집으로 가던 길에, 가마 안에서 음독 자결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78살이었다. 조병세도 미리 남긴 유서에서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대세가 이미 글렀으니, 오직 죽음으로써 위로 국가에 보답하고, 아래로 여러 사람에게 사죄하는 것”이라고 썼다. 그 또한 전직 관리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데 대해 사죄하고자 한 것이다.



이후에 많은 전직 관료, 양반 유생들이 자결 순국한 이유도 대체로 비슷하였다. 그들은 나라를 제대로 지키지 못해 나라가 위기에 처하게 된 것에 대해 자신이 책임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 자결 순국한 것이다.



2024년 오늘, 정부의 신뢰 상실과 국정 혼란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했다는 시국선언이 이어지고 있다. 그동안 여러 사고가 있었고, 여러 의혹이 제기되었으며, 민생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런데도 대통령과 장관 중에 누구 하나 내 잘못, 내 책임이라고 말하는 이가 없다. 책임을 져야 할 이들이 모두 변명과 책임 회피로 일관하고 있으니, 순국선열들에게 부끄럽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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