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15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1심 선고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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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재|논설위원
미국 사법부의 보수화를 이끈 존 로버츠 연방대법원장의 주특기는 ‘공익소송의 무력화’다. 그는 판사 임용 전 변호사로 활동할 때 시민단체가 정부나 기업을 상대로 낸 환경·인권 소송에서 피고 쪽을 대리해 대부분 승소했다. 그가 소송 전략에 활용한 것은 ‘절차주의’였다. 소송의 본질적 문제를 다투지 않고 원고의 적격성이나 법원의 관할권, 소송 기한 등 절차적 문제를 걸고넘어진 것이다. 그가 1990년 조지 부시(아버지) 정권의 법무부에서 일할 때 환경단체가 낸 소송(Lujan v. National Wildlife Federation)에서 구사한 전략이 대표적이다. 연방정부가 환경오염을 일으키는 광산 채굴을 허가한 것이 주민의 환경권을 침해했는지가 소송의 본질이었다. 그는 원고가 이 소송을 낼 자격이 있는지를 물고 늘어졌다. 광산에서 좀 떨어진 곳에 사는 환경단체 회원이 원고로 참여했는데, 로버츠는 원고 자격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전국에 있는 ‘환경에 관심이 많은’ 일반 시민들도 모두 원고가 될 수 있는 모순에 빠진다는 것이다. 연방대법원은 5 대 4의 표결로 그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로버츠는 곧바로 대형 로펌에 스카우트됐다. 기업들은 앞다퉈 그에게 공익소송을 맡겼다.
절차주의는 판사에게도 좋은 핑곗거리를 제공한다. 정부나 기업이 시민의 기본권을 명백하게 침해한 사건에서 판사는 절차적 하자를 핑계로 정부와 기업의 손을 쉽게 들어줄 수 있다. 변호사가 차려준 ‘밥상’을 못 이기는 척 받아먹으면 된다. 반면, 시민들은 절차주의가 강조될수록 불이익을 받기 쉽다. 절차적 장벽이 높으면 공익소송을 통한 시민의 기본권 구제가 힘들어진다. 공익소송을 통해 힘을 키워온 시민운동의 영향력도 그만큼 쇠퇴한다. 결국 절차주의는 미국 정치에서 진보 진영, 즉 민주당 쪽에 불리한 영향을 미친다. 미국 법조 전문기자 제프리 투빈은 자신의 책 ‘더 오스’에서 로버츠 대법원장처럼 보수 성향이 강한 법조인들이 절차주의를 활용해 자신의 정치색을 들키지 않고 공화당을 은밀하게 지원한다고 비판했다. 사법부의 정치적 중립을 가장한 ‘공화당 편들기’라는 것이다.
2023년 12월19일 서울고법은 ‘윤석열 징계 소송’에서 “면직 이상의 징계가 가능하다”는 1심 판결을 뒤집고 윤 대통령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소송의 본질인 징계 사유에 대한 판단은 하지 않고 징계 절차의 하자를 이유로 징계 처분을 취소했다. 윤 대통령의 변호인들이 주장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만약 징계 사유를 따졌다면 1심을 뒤집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1심 때 승소 판결을 받아낸 변호인을 교체해 윤 대통령 쪽에 일부러 패소하려는 게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다. 새로 선임된 변호인은 마치 ‘패소할 결심’이라도 한 듯 소송 대응에 소극적이었다. 서울고법 재판부는 이처럼 ‘한동훈 법무부’가 차려준 밥상을 그대로 받아먹은 것이다.
최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선거법 위반 사건 1심 재판은 사법부의 역할을 새삼 묻게 만든다. 보수 진영은 ‘피고인이 누구인지 눈을 가린 채 재판을 했을 때 나올 법한 형이 선고됐다’(법률신문 11월16일 ‘정의의 여신은 왜 눈을 가렸나’)고 호평한다. 거대 야당 대표라는 ‘정치적 사안’을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법리에 따라 판결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난 대선에서 숱한 허위사실을 유포한 윤 대통령과의 형평성은 어떻게 되나. “유권자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없도록 민의를 왜곡해” 낙선한 이 대표보다 당선된 윤 대통령이 더 무거운 처벌을 받아야 옳지 않나. 이런 모순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게 사법부가 해야 할 일 아닌가. 검찰의 ‘선택적 기소’에 눈을 가린 채, 검찰이 차려준 밥상을 그냥 받아먹기만 하는 것은 국민이 기대하는 사법부의 역할이 아니다.
판사들의 보수화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윤석열 정권 들어 더욱 심해졌다는 말이 나온다. 그 원인을 문재인 정권 때 있었던 ‘사법농단’ 수사에서 찾는 시각이 많다. 진보 정권에서 사법부의 권위를 깎아내리는 시도를 많이 했다는 피해의식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사법농단 수사의 지휘자는 윤 대통령이었고, ‘넘버2’는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였다. 판사 100명을 피의자처럼 조사했던 검찰은 지금 대통령 부부의 비위 의혹은 철저히 덮는다. ‘명태균 게이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법부는 ‘선택적 정의’를 방관할 것인가. 그게 ‘사법정의’인가.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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