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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9 (화)

제주 4·3 희생자 30명 무죄 선고…유족 “토벌대 들이닥쳐 끌고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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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제주지방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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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정이 많았다. 재산도 많았지만 동네 일에는 앞장섰다. 애월면 납읍리 주민들이 물이 없어 구르마(마차)로 해안마을에서 물을 길어다 먹는 게 안쓰러워 사재를 털어냈던 아버지다. 1948년 12월 토벌대가 들이닥쳐 아버지를 연행해갔다.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던 15살 딸이 끌려간 지 이틀 뒤였다.



“누님과 형님이 4·3사건 나기 전에 서울에서 학교에 다녔습니다. 방학을 맞아 고향에 왔던 15살 누님을 공산당이라면서 누군가 끌고 갔어요. 그날 이후 누님은 행방불명됐습니다. 이틀 뒤 끌려간 아버지는 목포형무소에서 1년을 살고 나왔어요. 한쪽 다리는 평생 못쓰게 됐고, 트라우마 때문인지 그 많은 재산은 모두 탕진하고 한 많은 인생을 살다가 돌아가셨습니다.”



19일 오전 제주지방법원 201호 법정에서 열린 4·3 직권재심에 나온 희생자 가족들의 사연은 저마다 달랐지만, 저마다 살아온 인생을 회고하며 법정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1960년대 베트남전에 육군 맹호부대원으로 다녀온 김세웅씨의 말에는 물기가 묻어났다.



“6·25 때 참전했다가 다친 형님은 제대해서 저에게 ‘너는 4·3에 대해서는 입도 뻥끗하지 말라. 아버지나 누님이나 4·3에 대해 절대 말을 하지 말라. 나중에 아이들 살아가는 데 지장을 주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잊고 살아왔습니다. 제가 제대를 한 뒤 관공서에 들어가 2∼3일 다녔는데 갑자기 집에 가라고 하더군요. 왜 그러냐고 했더니 ‘사상’에 걸렸다고 했습니다. 15살밖에 안된 누님이 뭘 안다고 붙잡아 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국가가 어떻게 판단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침착하게 말하던 김씨의 말은 흐려졌다. “무죄 판결을 해 주시면 판결문을 가지고 아버지 무덤에 가서 술 한잔을 올리고 크게 ‘아버지 무죄!’하고 외치고 싶습니다.” 방청석에 앉았던 이들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서울에서 이른 아침 비행기를 타고 법원을 찾은 이애순(77)씨.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다 서둘러 비행기를 탔다. 아버지(이광배)는 구좌면에서 농사를 짓다 끌려가 1949년 7월 군법회의에서 징역 7년을 받고 목포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다 행방불명됐다. 이씨 세 살 때다.



“저는 아버지 얼굴을 몰라요.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어요. 어머니 얘기로는 해방 뒤 일본에서 온 가족이 돌아왔고, 구금된 아버지를 꺼내기 위해 어머니가 집안의 패물을 끌어모아 갔는데 그날 저녁 목포형무소로 떠났대요. 그게 전부예요. 법원에 와서 오늘 처음으로 아버지가 토벌대에 연행된 사실을 알게 됐어요.”



증언석에서 마이크를 잡은 이씨가 떨리지만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어머니 아버지가 결혼신고도, 출생신고도 하지 않아서 저는 스무살 때까지 호적이 없이 살았어요. 주민등록증을 만들 때야 비로소 이모부 집의 동거인으로 출생신고를 했습니다. 이 세상에 왔다 간 근본이 저 혼자인데 우리 아버지 명예가 회복됐으면 고맙겠어요.“ 눈물짓던 이씨는 이제 공항으로 가봐야 한다며 겨울비를 맞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4·3 희생자 강진석의 여동생 강아무개(83)씨는 눈물부터 났다. 마이크를 잡자마자 울먹였고, 다리는 휘청거렸다.



“저는 7살, 오빠는 17살이었어요. 어렸을 때 소까이(소개)가라고 해서 아랫마을로 갔어요. 길에서 노는데 다른 사람이 오빠를 부축해서 가고 있었어요. 나는 놀러가는 줄만 알았는데, 그때 나가서 오늘날까지 소식이 없습니다.”



7살 강씨의 눈에 양쪽에 붙들려 가는 모습은 연행이 아니라 부축으로 보였다. “밭일하러 어머니가 어린 나를 집에 놔두고 가면, 오빠는 학교 가기 전에 맷돌에 보리를 갈아 내게 먹여주면서 저를 키웠어요. 그 오빠가 없어져서 오늘날까지 한이 맺힙니다. 나도 갈 때가 왔는데, 오빠 사망신고를 해서 돌아가고 싶은데 왜 안 될까요.” 강씨는 흐느꼈다.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한겨레

4·3 직권재심 재판에 나온 윤만석씨. 허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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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만석(76)씨는 목부터 메였다. 며칠 밤을 글을 쓰면서 준비했지만 정작 말은 목구멍에서 웅웅거렸다. 재심 개시 전부터 긴장한 표정이었다. 윤씨도 해병대 청룡부대원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고, 지금은 고엽제 후유증을 앓고 있다. 윤씨는 “제주읍내에서 마을 사람들이 옹기를 만들고 궤를 짜며 일하는데 1개 소대 군인들이 들어왔고, 군견이 친구의 아버지를 물었고, 돼지우리에 들어가 돼지를 물어 죽였다”라며 “군인들은 주민들을 보리밭에 모아놓고 친구 아버지를 총살하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 동생들과 백부, 숙부, 동네 사람들을 모두 잡아갔다. 어머니와 동생은 금방 돌아왔지만, 백부와 숙부는 행방불명되고, 아버지는 1년 만에 돌아왔다”고 말했다.



윤씨의 부친(윤동혁)은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돼 홋카이도의 탄광에서 3년 동안 노동에 시달리다 해방 뒤 고향에 돌아왔다. 4·3 시기에는 부친의 숙부 가족 9명이 총살되고, 부친의 형과 동생은 행방불명됐다. 부친은 1948년 12월 군법회의에서 내란죄로 목포형무소에서 1년간 수감된 뒤 1949년 10월 출소했으나 이듬해 6·25 전쟁이 발발하자 육군으로 징병 됐다. 가평지구 전투에서 다쳐 1951년 5월 의가사 제대한 뒤 1년 남짓 국가유공자를 대우를 받았지만, 4·3 당시 내란죄로 처벌을 받았다는 이유로 그 뒤 국가유공자에서 배제된 채 살다가 1985년 작고했다. 윤씨에게는 한으로 남았다. 윤씨는 준비한 원고를 읽다가 목이 메어 읽지 못하자 옆에 있던 김성훈 변호사한테 읽어달라고 요청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는 삶 때문에 일본에 밀항을 시도했다가 붙잡혀 부산으로 돌아와서는 아버지의 내란죄 이력 때문에 집단폭행을 당하고, 시청에 지원했던 일자리도 연좌제로 떨어지는 등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윤씨는 김 변호사가 원고를 읽어가자 눈을 감았다.



제주지방법원 제4형사부(재판장 방선옥)는 제주4·3사건 직권재심 합동수행단이 청구한 제56차 군사재판 직권재심 재판에서 4·3 희생자 30명 모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김세웅씨는 바람대로 아버지의 무덤에서 “아버지 무죄”라고 외칠 수 있게 됐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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