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잉넛’ 기타리스트 이상면이 먼저 읽고 그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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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록 | 밴드 ‘크라잉넛’ 베이시스트
해냈다. 무슨 일이 있어도 10월 한달, 30일 동안 매일 3㎞ 달리기를 하는 것.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303 챌린지’라는 이름까지 붙여 가며 달렸다. 그리 유난 떨 정도로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혼자만의 벅찬 기분을 기록해 본다. 달리기가 좋다는 것은 다들 안다. 문제는 ‘달리느냐, 마느냐’다. 부디 이 기록이 불안을 느끼는 누군가의 삶에 조금이라도 상큼한 레몬 같은 활력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10월은 뮤지션에게 바쁜 달이다. 감사하게도 많은 곳에서 크라잉넛을 찾아주었다. ‘303 챌린지’ 기간 동안 12개의 공연, 신곡 발표, 유튜브 콘텐츠 촬영에, 미팅과 합주까지 있어 꽤 바빴다. 그래도 무대 위에서 맑고 밝은 모습으로 관객들을 만나고, 항상 최선을 다해 샘물처럼 샘솟는 에너지를 서로 나누고 싶었다.
또한 뭔가 타성에 젖는 느낌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과연 나는 잘 살고 있는가?’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가끔 찾아오는 이런 신호들을 잘 들여다보면, 출구가 보인다. 아마도 그 신호가 성장으로 가는 화살표인지도 모른다. 작은 목표와 다짐, 그리고 성취감이 필요했다. 그래. 매일 3㎞ 정도는 달릴 수 있을 거야. 5㎞는 무리일지 몰라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바로 시작했다. 거창한 각오도 계획도 없었다. 일단 여기저기 떠벌이고, 소셜미디어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나한테 관심 없겠지만, 난 온 우주에 선언한 것이다. 나의 선언을 지키지 못하면 허풍이 되는 거고, 지키면 나와의 약속을 지켜낸 것이니 멋진 게임이 되는 것이다. 또 실패하면 어떠하리. 다시 시작하면 되는 것을.
내가 사랑하는 가을. 이름도 예쁜 시월. 낭만에 젖었어도 이삼십 대 때는 청춘 에너지로 나비가 힘차게 날갯짓하듯, 거뜬히 무대 위에서 날아올랐지만, 이제는 안다. 술과 낭만에 취해 무거워진 날개로는 결코 날아오를 수 없다는 것을. 날갯짓을 하면 할수록 바닥으로 가라앉게 된다는 것을. 시월. 맨정신으로, 제대로 가을에 취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303 챌린지’와 함께 금주도 병행했다.
3㎞ 달리기. 사실 며칠 달리는 것은 별것 아니지만, 30일 연속으로 달리기가 쉽진 않다. 무턱대고 시작했지만 달리다 보니 기획이 필요했다. 지방 공연도 있어서 시간 모자랄 때는 리허설 끝나고 뛰었고, 비가 오면 공연장 근처 헬스장을 미리 알아보았다. 페스티벌 끝나고 쉬고 싶어도 달려야만 했다. 그럴 때면 꼭 공연을 두번 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하루도 포기하지 않았다.
매일 달렸더니 체력이 좋아졌다. 행복은 하체 근육에서 나오는 것 같다. 땅을 밟고 걸을 때, 여유 있게 땅을 밀고 걷는 경쾌함은 내 몸이 배기량 높은 차로 업그레이드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은 살도 빠진 것 같고 피부도 좋아진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무대 위에서 자신감이 더 생겼던 것 같다. 실제로 살은 별로 빠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보다는 부정적인 생각들이 체지방 빠져나가듯 다이어트가 되고 건강한 자신감이 근육처럼 붙게 된 것 같다.
‘303 챌린지’ 도중 어느 유명인이 21㎞가 넘는 하프 마라톤에 성공했다는 글을 봤다. 순간 ‘아! 나 3㎞ 가지고 너무 유난 떠나!’ 싶기도 하다가 비교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내 속도대로 달렸다. 매일 3㎞를 30일 동안 달렸다. 뒤를 돌아보니 한달 동안 90㎞를 달려왔다. 그거면 됐다. 각자만의 눈금의 기준은 다 다르다. 누군가의 밀리미터가 누군가에겐 센티미터나 킬로미터일 수도 있다. 얼마만큼 해냈느냐가 아니라 얼마만큼 성장했느냐가 중요하다.
나는 대단한 사람도 부족한 사람도 아니다. 딱 평범한 사람이다. 내가 해냈으니,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거창한 꿈이 아닌 작은 목표 말이다. 삶의 작은 조각들이 모이면 아름다운 그림이 될 수 있다. 꼭 3㎞ 달리기가 아니더라도 괜찮다. 설거지를 미루지 않고 하기도 좋고, 청소를 하거나, 산책을 하루에 한번씩 하기도 괜찮다. 팔굽혀 펴기 한번도 좋고, 일주일 동안 금주 해보기, 커피 끊어 보기, 아침 스트레칭 하기 등 무엇이든 좋다. 거울 속 내가 풀이 죽어 있더라도 ‘괜찮다, 잘하고 있다’고 자신을 다독여 주자.
실패해도 괜찮다. 실패를 통한 배움이 있고, 적어도 망설이지 않고 시도는 해 봤기 때문에 나중에 ‘해 볼 걸’하는 후회는 남지 않는다. 실패하면 다시 시작하면 된다. 우리는 안 아프게 넘어지는 법을 배우는 거니까. 인생이란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다. 그 가치를 찾아가는 것이 인생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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