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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8 (월)

일상적 불심검문에 대학생·시민들 ‘불복종’…공권력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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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정부도 억압적 공권력 여전
한총련 수배자 검거 핑계 일제 검문
1998년 서울대생들 검문 거부나서
대학가 중심 ‘불복종 운동’ 번져나가

인권운동사랑방, 대학가 발맞춰
‘불심검문 거부 캠페인’ 대대적 전개
시민들 일상적 억압 불만…호응 커

경찰, ‘친절한 불심검문’ 태도 전환
무차별 검문 관행 서서히 줄어들어
진술조서 지장 거부 등 저항은 계속





한겨레

1998년 대학가를 중심으로 불심검문 거부 운동이 번져갔다. 명지대 앞의 불심검문 거부 캠페인 모습. 인권운동사랑방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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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말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터졌다. 성탄 특사로 전두환, 노태우 등 학살의 주범들이 대통령 특별사면을 받았다. 12월30일에는 사형수 23명에 대한 사형도 집행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마지막으로 사형이 집행된 것이다. 아이엠에프의 요구를 수용해 본격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이 밀어닥쳤고, 공권력의 서슬은 시퍼렇고 날카로웠다. 김대중 정부에 들어와서도 억압적인 정책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구조조정에 따라서 노동자들이 직장에서 대량으로 쫓겨났고, 거리에는 노숙인들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



1998년 암담한 상황에서 의미 있는 인권행동이 서울대학교 학생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불심검문 거부 운동’이었다. 당시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을 불법화한 당국은 한총련 수배자들을 검거한다고 대학가에서 수시로 일제 검문을 하고 있었다. 그해 3월20일, 한총련 산하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서총련)이 서울대에서 집회를 연다는 첩보(실제 이날 서총련 집회는 열리지 않았다)를 접한 경찰은 이른 아침부터 서울대 정문을 막고 출입하는 학생들에 대해 무차별 불심검문을 했다. 이런 일은 대학가에서 종종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날은 달랐다. 서울대 총학생회는 이의 부당함을 알리는 집회를 갖고 정문으로 몰려가서 경찰에 항의했다. 학생들은 경찰관직무집행법을 들어 경찰의 불법성을 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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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대학가를 중심으로 불심검문 거부 운동이 번져갔다. 서울대 앞의 불심검문 거부 캠페인 모습. 인권운동사랑방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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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대로 하자! 불심검문’ 캠페인 불붙다





이런 행동이 알려지자 대학가에 급속도로 불심검문 거부 운동이 번져갔다. 인권운동사랑방은 학생들의 자발적인 항의와 불복종운동을 접하고 4월7일 워크숍을 개최해, 15일부터 ‘법대로 하자! 불심검문’ 캠페인을 시작했다. 대학로에서 진행된 캠페인에는 대학생들만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의 호응도 뜨거웠다. 불심검문 대응 요령을 명함 크기의 카드로 만들어 배포하자 시민들이 너나없이 받아갔다. 불심검문 피해신고 전화도 개설하고, 불법 불심검문 사례는 모아서 소송도 진행했다.



시민들까지 이 캠페인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게 된 데는 평소 경찰의 불심검문에 대한 불만이 많았기 때문이다. 민주화가 되었다고 하지만, 경찰의 시민을 대하는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일제 검문을 하면, 지나가는 누구나 붙잡혀 신분증을 보여야 했고 가방을 열어야 했다. 검문을 피하기 위해서 경찰이 보이면 일부러 멀리 돌아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가장 심한 곳은 대학가였다. 대학가에서 집회를 막고, 한총련 수배자들을 검거한다는 명목으로 거의 매일 불심검문이 진행되었다. 여학생들의 가방에서 생리대며 속옷까지 꺼내서 들어 보이며 모욕하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길거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거리와 전철역, 고속버스 터미널 등에는 경찰이 항시 배치돼서 무차별적인 불심검문을 진행했다. 이런 모든 게 오랜 관행이었다. 독재정권 시기의 나쁜 관행이 시정되지 않고, 그대로 이어진 것이었다. 불복종 캠페인이 진행되면서 시민들은 자신의 권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다. 거리 곳곳에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경찰에 항의하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이전에는 생각도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경찰관직무집행법 제3조 제1항 제1호는 “수상한 행동이나 그 밖의 주위 사정을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볼 때 어떠한 죄를 범하였거나 범하려 하고 있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사람”을 불심검문 할 수 있다고 정해 놓고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상당한 이유”였다. 자의적인 판단으로 의심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또 법에는 경찰관이 불심검문을 할 때는 경찰관 증표를 제시하고, 소속과 성명을 밝히고,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검문을 당하는 사람은 질문을 거부할 수 있고, 경찰서로 동행하는 것도 거부할 수 있다. 이게 법으로 명문화된 것이지만, 경찰은 당연한 것처럼 법을 지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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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심검문 거부 캠페인 소책자 ‘불심검문과 인권’. 인권운동사랑방 제공






경찰 ‘친절 불심검문’ 돌아섰지만





이처럼 불심검문 거부 운동이 확산하여가자 경찰의 첫번째 반응은 서울경찰청이 일선 경찰서에 하달한 ‘친절 불심검문’ 지침이었다. 인권운동사랑방은 즉각 논평을 냈다. “경찰이 ‘친절’을 내세우면서도 과거와 같은 무차별적인 불심검문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라고 규탄했다. 인권운동사랑방은 이영태 활동가를 팀장으로 세워서 집회 장소나 거리에서 불심검문을 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현장에 즉각 출동했다. 곳곳에서 경찰과 마찰이 일어났다.



그런데 집단으로 움직이면서 행동을 하는 일은 그래도 할 만한 일이었다. 함께 항의하고 싸울 수 있으니까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그러나 개인이 혼자서 경찰에 항의하고 대항하는 일은 인권운동을 하는 나조차도 쉽지 않았다. 그때까지 내게 경찰은 두려운 존재였던 것 같다. 한번은 1호선 전철을 타고 동대문역에서 4호선으로 갈아타던 환승 통로에서 경찰이 나를 불러 세우고는 신분증을 보자고 했다.



“이거 불법인 거 아시죠?” 나는 경찰관직무집행법 제3조를 말해주면서 검문 거부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경찰은 “떳떳하면 신분증 하나 못 보여줄 게 뭐냐”면서 막무가내로 신분증을 보자고 하는 것이었다. “맘대로 하라. 나는 법대로 거부하는 거니깐” 하면서 가던 길을 가려고 했다. 그러자 경찰이 우르르 몰려와서 내 앞을 가로막았다. “이게 뭐하는 짓이냐. 경찰이 불법을 저질러도 되냐”고 항의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몰려와서 같이 항의하는 일이 벌어졌다. 시민들의 기세에 눌려서인지 경찰은 곧 길을 터줬는데, 경찰 한명은 내가 4호선을 타는 데까지 쫓아왔다.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났다.



불법 검문에 항의하는 일이 많아지자 경찰은 법에 있는 대로 소속과 이름을 밝히고, 검문 이유도 설명하면서 가는 사람을 붙잡아 세웠다. 경찰이 법 절차를 지켜서 신분증을 보자고 하면 시민들은 대체로 응했다. 그걸 거부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그해 9월에 6개월 동안 진행된 불심검문 불복종 캠페인에 대한 평가 워크숍을 열었다. 이때 가장 적극적으로 캠페인을 전개했던 서울대와 연세대 총학생회는 “학우들이 불심검문의 이유, 절차에 대해 문제 제기하고 집단적 저항을 하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인권운동사랑방의 이영태 활동가는 학생들에게 ‘거부의 권리’를 강조했다. 아무리 법적인 절차를 지키더라도 불심검문은 거부할 수 있다는 것으로 발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었다.







관행적 공권력 억압들 감시·저항





그해의 불심검문 캠페인으로 당장 경찰의 태도를 변화시킬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경찰의 억압적인 관행에 문제 제기를 하면서 서서히 불법적인 불심검문은 사라졌다. 로마 병정 같은 복장을 한 경찰이 늘어서서 지나가는 시민들을 감시하며, 언제든 붙잡아 세워서 신분증을 보자 하는 일은 이제 거의 없다. 이렇게 된 것은 인권단체와 학생 등 시민들의 노력이 더해진 덕분이었다. 공권력에 대한 감시와 항의는 이후 인권운동의 주된 활동이 됐다.



인권운동사랑방이 문제 제기를 하면서 바뀐 관행들은 이 밖에도 여러가지가 있다. 감옥에서 미결수와 기결수의 복장이 푸른색 수의로 같았는데,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서 미결수는 기결수와 복장이 달라야 한다는 점을 지적해서 미결수의 수의 색깔이 갈색으로 바뀐 것도 그 한 예다. 또, 검사의 약식명령에 불복해서 정식재판을 청구하는 일도 가능해졌다. 형사소송법에만 있던 사문화되었던 규정을 실제로 현실에서 살려낸 일이다.



나는 경찰서와 검찰에서 진술조서를 받고, 확인을 시킬 때 도장이 없으면 지문을 찍게 하는 관행도 거부했다. 간인도 확인란에도 서명으로 대신했다. 나의 지문을 찍는 일은 소중한 개인정보를 지키는 중요한 일이었다. 유치장에 들어갈 때도, 구치소에 수감될 때도 모두 지문을 찍게 했던 관행을 거부했다. 처음에는 강압적으로 지문을 강요하던 그들도 결국 나의 요구를 수용했다. 지금은 지문을 찍는 대신 모두 서명을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사소한 일 같지만, 이런 작은 것에서부터 변화를 만들어갔던 시절이 있었다.







박래군 | 36년째 인권운동가로 살고 있다. 유가협,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재단 사람을 거쳐서 현재는 4·16재단 운영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 ‘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 공저서 ‘이따위 불평등’ ‘새로고침’ ‘살아남은 아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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