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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4 (목)

[이한우의 간신열전] [260] 정(正) 자의 빛과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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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正)이라는 한 글자만 잘 음미해 보아도 정치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공자는 당시 실력자 계강자(季康子)가 정(政)을 묻자 정(正)이라고 답하면서 “대부께서 바름[正]으로 이끄신다면 누가 감히 바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했다. 이런 사례는 ‘논어’에 아주 많이 등장한다.

자로(子路)라는 제자가 “위(衛)나라 군주가 스승님을 기다려 정치를 맡기려 하니 스승님께서는 장차 무엇을 먼저 하시렵니까?”라고 묻자 “반드시 이름부터 바로잡겠다[正名]”라고 답했다. 또 “(임금의) 자기 몸이 바르면[正] 명령하지 않아도 일이 행해지고 자기 몸이 바르지 않으면[不正] 설사 명령을 내려도 (신하들이) 따르지 않는다.”

이때 말하는 정(正)과 짝을 이루는 말은 부정(不正), 즉 사(邪)이다. 그래서 정사(正邪), 즉 바르거나 그르거나라는 말이 있다.

이상은 수기(修己) 차원의 정(正)이다. 공자는 치인(治人) 차원으로 들어가면 정(正)과 중(中)이라는 짝을 강조한다. 이 경우 정(正)은 신하의 도리이고 중(中), 상황에 적중함[時中]은 군주의 도리가 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제나라 환공을 도와 패권을 이룩한 관중(管仲)에 대한 공자와 제자들의 시각 차이이다. 자공과 자로는 자기 주군을 배반하고 환공을 도운 관중을 부정(不正)하다고 보아 어질지 못하다고 했다. 그러나 공자는 단호하게 “환공은 제후들을 아홉 번 모으면서도 무력을 쓰지 않았는데 이는 관중의 힘이었으니 (누가) 그의 어짊만 하겠는가? 그의 어짊만 하겠는가?”라고 말했다.

지금 우리 정치는 여야 지도자 모두 정사(正邪) 중에서 사(邪)에 빠져 서로 진흙탕 싸움을 벌이고 있다. 언감생심(焉敢生心), 정(正)에서 중(中)으로 나아갈 고민은 해보지도 못하고 있다. 정사(正邪)의 정(正) 못지않게 중정(中正)의 중(中)을 잘 잡아 쥐는 지도자를 가져본 지가 언제이던가?/경제사회연구원 문화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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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 경제사회연구원 사회문화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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