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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4 (목)

[백승찬의 우회도로]이토록 친밀한 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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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서 주로 활동 연출가 요나 김
‘심청’ 추월만정 놓고 독창적 해석

예술의전당 ‘관행’엔 아쉬움 토로
내부를 벗어난 ‘외부의 시선’ 신선

심청은 ‘눈먼 아버지를 위해 공양미 300석에 팔려간 효녀’다. 현대인의 감각으로 볼 때 ‘부처님께 공양미 바치면 눈을 뜰 수 있다’는 제안은 종교를 빙자한 사기고, 비록 자발적이라고는 하나 심청이 공양미와 목숨을 바꾸는 행위는 끔찍한 인신매매다.

국립극장과 전주세계소리축제는 현대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이 기괴한 이야기를 내년 공연을 목표로 제작 중이다. 판소리 대본을 활용해 소리꾼이 노래하니 ‘창극’이라 불릴 만하지만, 제작자들은 ‘소리악극’ 같은 새로운 장르 이름을 구상 중이다.

과거 한국의 정서에 기반한 이 작품이 동시대 세계 관객의 관심을 받을 수 있을까. <심청>을 연출하는 요나 김은 듣도 보도 못한 해석을 들려줬다. “심청 이야기는 너무나 보편적이에요. 옛 동화들이 착한 것 같지만 그 안에는 끔찍한 권력 구조, 억압의 역사가 녹아 있거든요. 지금도 힘든 사회에 가면 딸 팔아먹는 일이 있어요. ‘공양미 300석’이 아니더라도 매매 방식은 다양하니까. 마을 사람들도 이상하죠. 심청 팔려 가는데 말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비석 세워주고 끝. ‘하늘이 내린 효녀’라고 칭송하니, 심청은 안 갈 수도 없고…. 심청이 죽지 않고 용궁에서 살다 황후가 된다는 설정도 그래요. 사람들이 죄책감이 너무 심하니까, ‘살아났다’는 소문내고 믿고 싶은 거 아닐까요.”

요나 김의 해석 속에서 ‘추월만정’은 용궁의 심청이 아버지를 그리는 노래가 아닌, ‘딸이 나를 그리워하면 좋겠다’는 ‘아빠의 로망’을 담은 노래가 된다. 심청은 남성 중심 공동체를 위해 희생된 이피제니, 안티고네 같은 그리스 비극 여주인공의 격조를 갖는다.

요나 김은 독일 만하임 국립극장 상임연출가다. 오스트리아 빈 국립대에서 미학, 철학, 연극학 등을 공부해 박사 학위를 받았고, 유럽을 중심으로 오페라 연출가, 창작오페라 대본가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달에는 국립오페라단에서 바그너의 <탄호이저>를 연출했다.

그가 들려준 <탄호이저> 후일담도 흥미롭다. 유럽보다 리허설 시간이 적게 주어졌다는 점은 작은 아쉬움이었다. 한국의 스태프는 마감 기한에 맞춰 어떻게든 일을 해내기로 정평이 나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공연장 쪽이었다. 요나 김이 공연에 관한 아이디어를 낼 때마다 공연장인 예술의전당은 ‘관행’을 이유로 반대했다고 한다. 합창단이 객석 통로로 등장하는 아이디어를 두고서도 예술의전당은 무대로 오르는 계단 설치에 난색을 보였다. 요나 김은 오랜 시간 설득해야 했다. 살아남지 못한 아이디어도 있었다. 애초엔 탄호이저와 엘리자베트가 죽고 홀로 살아남은 베누스가 오페라극장을 벗어나 예술의전당 앞 도로 쪽으로 나가는 모습을 카메라가 뒤쫓아 무대 위 영상으로 중계하는 결말을 생각했다. 일종의 ‘메타 오페라’적 연출이었다. 요나 김은 “‘예술의전당 건물이 영상에 나오면 안 된다’는 이유로 아이디어가 거부됐다”며 “(예술의전당은) ‘안 된다’고 말하는 걸 즐기는 것 같다”고 했다.

예술의전당은 클래식, 연극, 뮤지컬, 무용 분야 예술가들이 선망하는 공연장이다. 대관 경쟁도 치열하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라면 예술의전당에 불만이 있더라도 이를 기자에게 직접 토로할 가능성은 낮다. 향후 작업의 불편, 불이익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요나 김의 비판이 신선했던 것도 이런 이유다.

요나 김은 대부분의 직업 경력을 유럽에서 보냈지만 국적은 여전히 한국이다. 유럽인, 한국인과도 모두 소통할 수 있지만, 한국 내부의 관행, 시선, 관계에는 얽매이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번역가 데버라 스미스도 요나 김과 비슷한 위치다. “한강의 작품을 사랑하는 세계의 무수히 많은 독자 가운데 한 사람”을 자처하는 그는 한국 문학에 관심을 가져 한강, 배수아 등의 작품을 영어로 번역해왔지만, 한국에 살거나 한국 문단에 속하지 않는다. 스미스를 비롯한 여러 번역가의 수고 덕에 한강은 아시아 여성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미국 뉴욕 타임스스퀘어에 비싼 광고를 해도 한국 이미지가 좋아지진 않는다. 한국에 관심 없는 해외 석학에게 한국 사정을 물어도 빼어난 통찰을 구할 순 없다. 한국 문화가 특수성을 유지하면서도 보편성을 획득하는 데 도움 줄 수 있는 사람은 한국 문화에 애정을 갖되 한국 내부 시선엔 함몰되지 않는 이들이다. 요즘 인기 있는 드라마 제목을 살짝 비튼다면 ‘이토록 친밀한 타인’이다.

경향신문

백승찬 문화부 선임기자


백승찬 문화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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