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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 (금)

서태지도 인권영화제도 ‘표현의 자유’를 위해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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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자유 갈등 첨예했던 1997년
서태지, 검열 저항 ‘가사삭제’ 앨범
왕자웨이 영화 수입금지 사건까지

경찰봉쇄 속 열린 제2회 인권영화제
관객들 매일같이 영화보러 몰려들어
제주 4·3 다룬 ‘레드 헌트’에 큰 관심
서준식 집행위원장 구속 핍박 당해

학계·영화계·국제인권단체 항의 성명
서준식 공대위, ‘레드 헌트’ 상영 운동
서 위원장 석방…세번째 영화제 결실





한겨레

1997년 9월 제2회 인권영화제가 열리는 장소였던 서울 홍익대 정문 앞에 학교 당국이 행사 불허 방침을 알리는 안내판을 세웠다. 인권운동사랑방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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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정권 말년에 해당하는 해였던 1997년은 ‘표현의 자유’와 관련한 이슈들이 끊이지 않던 해였다. 음반에 대한 사전검열 제도는 가수 정태춘의 선도적인 투쟁과 1995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저항(4집 앨범 ‘컴백홈’에 실린 ‘시대유감’의 가사를 공연윤리위원회(공윤)가 문제 삼자 가사를 삭제한 채 발매) 등에 힘입어 ‘음반 및 비디오물에 관한 법률’이 개정되었다. 6년여 동안의 투쟁이 결실을 맺어서 대중가요에 대한 검열이 철폐되었다.



그렇지만 영화는 그렇지 않았다. 1997년에 개정된 영화진흥법에는 사전심의 관련 조항이 그대로 존속되었고, 스크린 쿼터 축소 조항도 들어 있어서 영화계가 반발하고 있었다. 1997년 7월에 공윤은 세계적인 영화배우 장궈룽(장국영), 량차오웨이(양조위) 등이 나오는 왕자웨이(왕가위) 감독의 홍콩 영화 ‘부에노스 아이레스’(해피 투게더)를 수입 금지했다. 장선우 감독의 ‘나쁜 영화’는 한국 영화 최초로 등급 외 판정을 받았다. 1996년에 이어서 1997년에도 서울퀴어영화제가 무산되었다. 만화계에서는 만화가 이현세의 ‘천국의 신화’가 음란성과 폭력성을 담고 있다고 해서 검찰에 소환 조사를 받는 일로 만화가들이 단체로 절필 선언을 하기도 한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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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서울 홍익대에서 열린 제2회 인권영화제가 경찰과 학교 당국의 행사 불허 방침 속에 야외 상영을 하던 모습. 인권운동사랑방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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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의 영화제 원천봉쇄





제2회 인권영화제는 언제든지 탄압으로 중단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시작되었다. 개막일인 1997년 9월27일 경찰이 서울 홍익대 정문을 원천봉쇄하여 한때는 출입마저 가로막았다. 그럼에도 시민들은 인권영화제를 찾았다. 개막식이 예정되었던 오후 2시에는 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학교 쪽은 개막식이 열릴 예정이었던 와우관을 폐쇄하였다.



어쩔 수 없이 개막식은 와우관 마당에서 열었다. 개막작인 볼리비아 우카마우 집단의 ‘새의 노래’를 학생회관 휴게실에서 상영하려던 순간 학교는 전기마저 차단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발전기를 준비해놓고 있었다.



“어디서든지 영화제는 계속한다”는 게 인권영화제 방침이었다. 학교가 상영 장소를 막으면 미술관 앞 계단(이른바 롱다리 계단)과 같은 야외에서도 상영을 이어갔다. 가을날의 야외상영은 운치는 있었지만, 바람이 불어와서 스크린이 넘어지는 상황도 종종 발생했다. 중간에 발전기가 꺼지는 사고도 일어났다. 그럴 때마다 나를 비롯한 활동가들은 분주하게 사고를 수습하기에 바빴다. 그러니 관객들이 영화에 몰입해서 볼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관객들은 매일 영화를 보러 홍익대로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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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인권영화제 포스터. 인권운동사랑방 제공


제2회 인권영화제 상영작 가운데 가장 인기가 많았던 작품은 단연코 ‘레드 헌트’였다. 제주 4·3사건을 다루는 것은 그때까지 금기시되어 있었다. 제주 4·3사건을 아무런 제지 없이 말할 수 있었던 것은 2000년 1월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공포된 이후부터였다. 제2회 독립다큐영상제는 이 영화를 상영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행사를 열 수 있었다. 하지만 ‘인간을 위한 영상을 찾아서’를 모토로 내건 제2회 인권영화제는 “탄압을 받더라도 공공연하게 상영하자”는 입장이었다.



첫회 영화제 상영작인 ‘하비 밀크의 시대’는 앙코르 상영되었다. 미국의 게이 활동가인 하비 밀크는 샌프란시스코의 시정감시관에 선출되어 지역 사회의 산적한 문제들을 진보적인 관점에서 해결하려 노력하다가 결국 죽음을 맞게 된다. 미국 사회의 편견과 그를 깨려는 운동에 대해서 소개하는 1980년대의 미국 다큐멘터리의 대표작이어서인지 앙코르 상영인데도 관객들의 호응이 좋았다.



그리고 제2회 인권영화제를 대표하는 작품은 뭐니뭐니 해도 ‘쇼아’(Shoah)였다. 프랑스의 클로드 란즈만 감독이 11년에 걸쳐서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나치의 유대인 강제수용소들을 방문하여 보여주고, 관련자들을 인터뷰해서 만든 다큐멘터리다. 러닝 타임만 무려 9시간을 넘기는 대작이었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대해서 별로 소개되지 않았던 당시 한국에서 나치의 유대인 절멸을 본격적으로 다룬 영화였다. 인권영화제 조직위원회는 영화제가 끝난 다음인 10월5일에 이 영화만을 상영하는 자리를 따로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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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집회에서 인권영화제 서준식 집행위원장의 구속에 항의하는 모습. 인권운동사랑방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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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준식 영화제 집행위원장 구속





영화제 상영 기간인 10월1일 새벽 1시45분께, 경찰은 홍익대 총학생회실 등에 대한 압수수색을 벌이고, 총학생회 간부 2명을 체포했다. 경찰이 압수수색을 단행했지만, 우리는 미리 비밀 장소에 발전기와 스크린 등 영화 상영 장비들을 감쪽같이 감추었기 때문에 큰 피해는 없었다. 하지만, 조기 종결하지 않으면 총학생회 간부들을 구속하겠다는 경찰의 압박 때문에 우리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결국 인권영화제는 폐막 하루를 앞두고 10월3일 조기 폐막했다. 이후 명동성당과 명동 향린교회 등에서 상영회를 이어갔다. 지역영화제들도 탄압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일부 지역에서는 문제가 되는 ‘레드 헌트’ 상영을 포기하기도 하였다.



당국의 탄압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1월4일, 서준식 영화제 집행위원장을 전격 체포, 구속하였고, 인권운동사랑방을 압수수색했다. 사전심의를 받지 않고 인권영화제를 개최해 ‘레드 헌트’ 등을 상영한 것에 대해 ‘음반 및 비디오물에 관한 법률’(음비법),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를 적용했다. 이에 맞서서 영화제 조직위원회를 중심으로 ‘서준식 무죄 석방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를 구성하였다. 공대위는 ‘레드 헌트’ 전국 동시 상영회를 추진했고, 영화과 교수, 한국현대사 사학자, 법학자 등 전문가들의 입장 표명을 조직했다. 국제앰네스티를 비롯한 국제사회도 정부의 탄압에 항의하는 입장을 속속 발표했다. 이런 움직임 덕분에 서준식 집행위원장은 1998년 2월5일 보석으로 풀려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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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인권영화제 불허 방침에 항의하는 학생들. 인권운동사랑방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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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인권영화제가 승리했다





제3회 인권영화제는 12월5일부터 10일까지 동국대학교에서 열렸다. 개막식에서 서준식 집행위원장은 “정부의 탄압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1년이 지난 오늘 많은 이들의 격려 속에 다시 제3회 인권영화제의 막을 올릴 수 있게 된 것은 ‘표현의 자유’를 기치로 내건 인권영화제의 승리”라고 감회를 말했다.



그해 상영된 영화 중에는 3부작 ‘칠레전투’가 단연 압도적이었다. 1970년 칠레 아옌데 정권이 수립된 이후 전국에서 민중들의 조직이 만들어지고, 대중투쟁이 진행되는 과정을 담았다. 1973년 미국은 아옌데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한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다. 대통령궁에 대한 폭격 장면부터가 충격이었다. 현장 촬영 중에 군이 쏜 총탄이 카메라 렌즈를 맞추던 순간 카메라는 멈췄다. 다큐멘터리의 명작이었다. 폐막작으로는 ‘칠레, 지울 수 없는 기억’을 상영했다. 두 작품 모두 파트리시오 구스만 감독의 작품이다.



국내작은 박종필 감독의 ‘아이엠에프(IMF) 한국, 그 1년의 기록’이 관객들의 관심을 끌었다. 6개월 동안 노숙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기록한 이 작품은 현장 다큐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그런데 박 감독은 상영시간 직전에서야 작품 편집본을 넘겨주었다. 그가 헐레벌떡 뛰어오면서 건네주었던 비디오테이프의 따끈따끈함이 지금도 기억난다. 박 감독은 이후에도 인권영화제에 다수의 작품을 출품했다. 꾸준히 작품활동을 하던 그는 2017년, 목포신항에 거치된 세월호를 촬영하던 중 간암을 얻었고, 그해 여름 세상을 떠났다. 제3회부터 인권영화제에는 국내 다큐 작품들이 많이 출품되었다. 나는 이때부터 주로 국내 영화를 선정하는 역할을 맡았다.



2013년, 인권영화제는 인권운동사랑방에서 ‘서울인권영화제’로 독립하였다. 몇년 동안은 인권영화제가 상영관으로 들어가서 진행되기도 했지만, 주로 서울 청계광장을 거쳐서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등 주로 야외 상영으로 맥을 이어갔다. 지역에서는 인천 지역만 인권영화제가 매년 지속되고 있다. 인권영화제는 지금도 표현의 자유를 위한 투쟁을 멈추지 않고 있다.







박래군 | 36년째 인권운동가로 살고 있다. 유가협,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재단 사람을 거쳐서 현재는 4·16재단 운영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 ‘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 공저서 ‘이따위 불평등’ ‘새로고침’ ‘살아남은 아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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