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발 보고서에 지장을 찍지 않겠다고 버틴 수용자에게 징벌을 내리는 건 부당하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사진은 대구교도소 수용 거실. 사진 법무부 교정본부 홈페이지 |
2022년 3월 2일 아침, 대구교도소 한 감방에서 이불 정리를 두고 수용자들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A씨가 정리한 이불을 B씨가 “이렇게 삐뚤어지게 세우면 넘어지지 않겠느냐”며 바로 세웠고, 이를 두고 두 사람 사이에 시비가 붙은 거였다.
교도소 측에 따르면 A씨는 “이런 식으로 하면 나는 안 한다. 니들이 알아서 해라, XX”이라고 욕설을 했다. 이에 B씨는 큰 소리로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주려고 하는데 왜 욕을 합니까. 욕하지 마세요”라고 항의했다. A씨는 “너 그러다가 나한테 죽는다 XX야”라고 받아치며 말다툼을 벌였다.
교도관은 A씨를 상대로 ‘징벌행위대상 적발 보고서’를 쓴 뒤 보고서에 지장을 찍으라고 지시했다. 적발 보고서는 징벌을 내리는 대신 발부하는 경고성 서류로 일명 ‘스티커’ 라고 불린다. 그러나 A씨는 “내가 왜 스티커를 찍냐. 생활하다 보면 말다툼할 수도 있는데 왜 지장을 찍나. 나는 안 찍는다”라며 고함을 지르고 거부했다.
이에 교도소는 A씨에게 금치 20일의 징벌 처분을 내렸다. 금치(禁置)란 일정 기간 독방에 가둬 두고 전화·접견 등을 제한하는 처분으로, 교정시설 내 14개 징벌 중 가장 무겁다. 처분 이유는 ▶다른 수용자의 평온한 수용 생활을 방해했으며 ▶교도관의 직무상 지시나 명령을 따르지 않고 ▶교도관의 직무를 방해했다는 것이었다.
A씨는 징벌을 취소해달라며 교도소장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A씨는 “욕을 하거나 큰 소리를 낸 건 오히려 B씨”라며 “그런데도 교도관은 사실과 다른 보고서를 발부하면서 지장을 요구했다. 보고서 내용을 인정할 수 없어서 지장 찍기를 거부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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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심 법원은 A씨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자신에게 불리한 보고서에 지장을 찍으라는 교도소 측의 지시가 부당하다고 봤다. 법원은 “적발 보고서는 수용자가 잘못을 인정하는 경우에 발부하는 것”이라며 “보고서에 서명 또는 무인(손도장)을 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보고서에 기재된 행위를 사실상 인정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재판부는 이같은 요구가 “모든 국민은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아니한다”는 헌법상 원칙에 반한다고 봤다. 보고서 내용은 욕설, 소란행위 등을 담고 있어 징벌이나 형사책임과도 연결될 가능성이 있는데, 이에 대한 진술을 거부하는 건 헌법이 보장한 A씨의 권리라는 것이다.
재판부는 A씨 징벌은 B씨와 싸워서라기보다는 보고서에 지장 찍기를 거부하면서 내려진 것인데, 이불 정리 문제로 소란을 피운 점은 징벌을 내리기에는 가볍다고 봤다. 그러면서 A씨에게 내린 금치 20일의 징벌 처분을 취소하라고 판결했다.
2심 재판부 역시 같은 판단을 내렸다. 2심 재판부는 “A씨에게 내려진 징벌은 지장을 찍으라는 교도관의 지시가 적법하다는 걸 전제로 한다”며 교도소 측 징벌이 부당하다고 봤다.
교도소는 이같은 판결에 불복해 상고했으나 대법원의 판단도 같았다. 대법원 1부(주심 노경필 대법관)는 지난달 25일 A씨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대법원은 “교도관이 A씨에게 지장을 지시·명령하는 것은 헌법상 보장되는 자기부죄 거절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어서 부당하다”며 “원심 판단에 진술거부권 침해에 관한 법리오해 등으로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없다”며 교도소 측의 상고를 기각했다.
최서인 기자 choi.seo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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