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삼척의 오십천은 약 1백리(40㎞)의 길이를 가졌다. 내미로천이 합수하는 곳을 지나서 조금 더 내려가면 소나무 몇그루가 서있는 바위섬이 보인다. 도로와 나란히 흐르던 강물이 방향을 바꾸면서 혼자 내달리는 지점이다. 강줄기가 사방을 휘감고 있다. 솔섬이라고 부르면 딱 좋겠다. 자연스런 풍광 아래 인위적으로 만든 비석이 있는지라 멀리서도 확 눈에 띈다. 이 지역에 오래 살고 있는 D도반이 한 마디 보탰다. “이 앞을 지나갈 때마다 무슨 비석일까 하고 늘 궁금증을 일으켰다.”
오후 2차 답사 때는 장갑과 장화 그리고 낫을 준비했다. 후학 1명을 포함하여 3명이 함께 가기로 의기투합한 것이다. 후배에게 별다른 취미가 없으면 시간 날 때마다 답사를 다니는 게 어떠냐고 권했다.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동호인 1명을 더 늘린 셈이다. 사실 오전에 혼자 1차 답사를 시도했다가 헛걸음했다. 우선 섬 입구를 찾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한 바퀴를 빙 둘러보아도 전부 물길뿐이다. 가을가뭄으로 인하여 물이 흐르지 않는 ‘길 아닌 길’에서 자갈과 모래톱으로 연결된 지점을 찾아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바닥에는 군데군데 물도 흥건하고 게다가 풀까지 우거져 도저히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다시 사찰로 돌아와서 장비를 챙기고 난 뒤에야 갈대를 헤치고 풀을 밟으며 겨우겨우 섬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혼자선 엄두도 내지 못했던 일도 여럿이 하니 수월했다.
강원도 삼척 오십천 솔섬. 사진 원철 스님 |
건립한 지 오래되지 않은 새 비석이다. 주변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걸로 봐서 지금도 관리를 받고 있는 공간임을 알게 해준다. 전면에는 ‘강릉최공휘영원추모비’(江陵崔公諱永遠追慕碑)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주인공 최영원(1832~1864) 선생은 최필달(崔必達) 강릉 최씨 시조의 31대손이다. 필달 공(公)은 고려 건국의 공신이며 강릉의 12명 향현(鄕賢·향토 선비)을 모신 향현사(鄕賢祠)에 배향되어 있는 어른이다. 영원 선생에 대한 자세한 행적은 자세하지 않다.
본래 이 자리에는 회강정(洄江亭)이란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조선 성종 때 형조 참판을 지낸 최응현(崔應賢·1428~1507) 선생이 산수를 감상하기 위하여 정자를 지었다. 삼척팔경에 들어갈 만큼 눈맛을 자랑하는 곳이다. 비록 지금은 없어졌지만 회강이라는 이름 그대로 강물이 휘돌아 가는 바위 섬 위의 몇 그루 소나무 아래의 운치 있는 정자는 상상만 해도 저절로 힐링이 되었다. 바위에는 ‘회강정’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고 하나 그날은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1662년 허목(許穆·1595~1682) 삼척 군수가 편찬한 ‘척주지’(陟州誌)에 의하면 ‘오십천은 백리를 흐르는데 굴곡이 심하여 오십번을 꺾고 나서야 동해바다에 이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중국 황하(黃河)는 만절필동(萬折必東·만번을 굽이치며 동쪽으로 흐른다)이라는 삼척판 버전인 셈이다. 영동지방에서는 가장 긴 하천이다. 도계읍 구사리 백산마을 큰덕샘에는 ‘오십천 발원지’ 기념비도 있다. 서출동류수(西出東流水·서쪽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흐르는 물) 지역은 풍수가들의 말에 의하면 산에서는 인물이 나고 물에서는 재물이 난다고 했던가. 이래저래 명당으로서 조건을 딱 갖춘 곳인지라 많은 이들이 욕심을 냈겠지만 솔섬은 이미 지역의 유력가문인 강릉 최씨 집안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다.
돌에 새겨진 회강정. 사진 원철 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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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섬 주변의 들판은 비가 많이 오면 늘 홍수의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홍수 방지를 위하여 주변에 방수림(防水林)을 조성했고 나무(山林)를 베지 못하게(禁) 특별관리를 했다. 그래서 금산평(禁山坪)으로 불렸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대비를 한다고 해도 인간의 능력으로 자연의 힘을 이겨내기에는 역부족이다. 50~60명이 앉을 수 있는 넓은 바위 위에 만들어진 몇평 규모의 작은 정자는 어느 날 사라졌다. 짐작컨대 홍수 때 약해진 주변 지반이 무너지면서 함께 넘어진 것이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솔섬 위까지 물이 넘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더욱 명당으로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정자도 없어진 빈 터에 1864년 후손들은 최영원 선생의 묘자리를 만들었다. 2002년 여름 태풍 루사로 인하여 영동지방에 엄청난 양의 폭우를 뿌렸다. 전대미문의 홍수로 인하여 두타산 중턱에 있는 천은사도 계곡물이 넘치면서 1층의 대중용 식당인 공양간까지 물에 잠기는 난리를 치루었다. 당연히 하류의 솔섬에도 물이 범람했고 그때 묘역 또한 안타깝게도 유실되었다. 안장 후 150여년 만에 만난 대홍수는 명당도 피해가지 못했던 것이다. 이를 애통히 여긴 36대 후손들은 그해 바로 추모비를 세웠다. 조선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시대를 증명하는 지역사를 품은 터가 된 것이다. 묘지를 대신한 20여년의 역사를 가진 비석이 앞으로도 그 자리를 굳건히 지켜주길 축원했다.
솔섬에 있는 최영달 추모비. 사진 원철 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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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길이 없어 들어가지 못했다고 통화한 최선도 삼척문화원장께 오후에는 만반의 준비 끝에 무사히 답사를 마쳤다고 말씀드렸다. 경북 구미지방에 출장을 나온지라 함께 하지 못함을 애석해 하셨다. 지난번 삼척을 찾았을 때도 하루종일 함께 하면서 지역의 구석구석까지 설명해주신 자상한 모습이 떠올랐다. 오전 통화에서도 솔섬의 비석과 회강정에 대한 긴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더불어 되돌아 온 길을 따라 풀을 헤치고 물을 밟으면서 목이 긴 장화에게도 또 다시 고마움을 표했다. 모래 자갈길을 빠져나온 뒤에야 평소에 신던 신발로 갈아 신었다. 어렵게 답사를 마친 뒤에 오는 뿌듯함을 안고서 돌아오는 발걸음은 더없이 가볍다.
비석에 대한 궁금증은 해소되었지만 또 다른 많은 생각을 하도록 만든 솔섬 답사였다. 이제까지의 경험치는 미래까지 담보해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를 알게 된 것이다. 앞으로도 기후위기는 우리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 예상조차 할 수 없는 시대가 온 것을 알리는 서막이라면 서막이라 하겠다. 지난 여름은 엄청 더웠다. 열대야로 잠못 이룬 밤이 계속되었다. 더 비관적인 전망은 2024년 여름이 앞으로 더욱 심해질 더위의 전주곡이라는 장기예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오지 않을 것 같은 가을이 왔다는 사실에 매우 안심하는 중생(衆生)세계의 청량한 아침이다.
원철 스님(불교사회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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