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국제공연예술제 ‘바이 하트’ 연출 티아고 호드리게즈
77년 역사 佛아비뇽 페스티벌 최초 非프랑스인 예술감독
티아고 호드리게즈의 '바이 하트' 지난해 아비뇽 페스티벌 공연 장면. ©Christophe Raynaud de Lage, Festival d'Avign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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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아고 호드리게즈 아비뇽 페스티벌 예술감독. /유러피언극장협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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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명의 자원자가 필요합니다. 무대에 오른 관객 분들은 저와 함께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외울 겁니다.”
19일 서울 대학로극장 쿼드,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초청작 ‘바이 하트(By Heart)’의 연출가 티아고 호드리게즈가 무대 위에서 묻자, 200여명 관객 중에 10여 명이 성큼성큼 올랐다. 의자는 10개 뿐. 한 발 늦은 관객 한 명이 돌아서자 호드리게즈가 말했다. “아, 이런. 오늘은 자리가 꽉 찼네요. 내일도 공연하니까 꼭 와주세요.” 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호드리게즈는 2022년부터 세계 최대 공연예술축제 중 하나인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의 예술감독으로 재임 중이다. 이 축제의77년 역사상 첫 비(非)프랑스인 예술감독. 아비뇽페스티벌은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페스티벌, 캐나다 퀘벡의 시나르와 함께 첫 손에 꼽히는 세계 최대 공연예술축제다.
포르투갈 출신 작가·연출가 티아고 호드리게즈(가운데 선 사람)의 지난해 프랑스 아비뇽 '바이 하트' 공연 모습. 그는 아비뇽 페스티벌의 첫 비(非)프랑스인 예술감독이다. /©Christophe Raynaud de Lage, Festival d'Avign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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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한 관객들을 무대 위 의자에 한 명씩 앉힌 뒤, 호드리게즈는 한국어로 외워(learn by heart) 온 셰익스피어 소네트 30번의 14행을 한 행 한 행 알려주며 함께 외워 나갔다. 중간중간 호드리게즈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제 할머니는 포르투갈 시골 마을의 여관 안주인이자 요리사였죠. 93세 되던 해에 시력을 잃게 될 거라는 진단을 받고, 할머니는 손자에게 ‘외워서 마음으로 계속 읽을 수 있는 책을 한 권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셨어요. 무슨 책을 가져다 드려야 할까요. 이 공연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파스테르나크를 스탈린에게서 구한 소네트
'닥터 지바고'를 쓴 소련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말년 모습. /시카고 시 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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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러시아어로 번역해 극찬 받던 셰익스피어 소네트의 번호였다. 회의장에 모인 2000여명의 작가는 ‘30′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다. 모두 일어섰고, 파스테르나크와 함께 셰익스피어 소네트 30번을 암송했다. 암송이 끝났을 때, 서슬퍼렇던 소련 비밀경찰도 파스테르나크를 체포할 수 없었다. “우리는 기억을 통해서 존재하며, 그들은 우리의 기억 속에 있는 것을 건드리지 못합니다. 돈, 집, 가족, 일, 모든 걸 빼앗아갈 수 있어도, 우리가 내면에 지닌 것들을 그 X자식들은 건드리지 못해요.”
◇책을 불태우는 시대의 꺼지지 않는 촛불
한 행씩 한 행씩, 무대 위의 관객 자원자들은 호드리게즈와 함께 셰익스피어 소네트를 외워나갔다. 호드리게즈의 이야기는 다시 이어졌다. “모세오경과 탈무드, 유대인의 책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던 나치 비르케나우 수용소의 유대인 사서는 절망에 빠진 수용자들에게 말했죠. ‘내게 와서 읽어요. 책을 잃었다고 해도 괜찮아요. 나를 열고 내 안의 책을 읽어요.’ 하지만 그 정반대 어두운 쪽에, 기억력의 ‘다스 베이더’도 있습니다. 아돌프 히틀러죠. 그는 비엔나의 풍경을 건물 유리창 개수까지 정확히 외워 그릴 수 있었다고 해요.”
책을 금지하고 불태우는 시대를 그린 디스토피아 SF '화씨 451'(1953)의 초판본 표지와 미국 작가 레이 브래드버리(1920~2012). /위키미디어커먼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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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방화관이 어느 부인의 비밀 서고를 불태울 때 나온 책 속에 적힌 문장이 그의 마음에 날아와 박힙니다. ‘인간답게 행동해야 해요, 리들리 주교님. 우린 오늘 하나님의 은총으로 촛불 하나를 켤 뿐이지만, 잉글랜드에서 이 촛불은 결코 꺼지지 않을 겁니다.’ 가톨릭 교리를 부정했다는 이유로 화형당하기 직전 성공회 순교자 휴 래티머(1487~1555) 주교가 했던 말이죠. 방화관은 저항군에 가담하게 됩니다.”
◇”예측불가능성의 수조 속으로 다이빙하듯”
티아고 호드리게즈 아비뇽 페스티벌 예술감독. /예술경영지원센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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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텍스트의 미로를 거쳐 긴 이야기들의 끝에서, 무대 위와 객석의 관객 200여 명은 불의한 세상과 인간의 한계에 맞선 문학과 예술의 힘을 만나게 된다. 그 상징과 같은 셰익스피어 소네트 30번 14행을 모두 외우게 되는 건 덤이다.
티아고 호드리게즈의 '바이 하트' 지난해 아비뇽 페스티벌 공연 장면. /©Christophe Raynaud de Lage, Festival d'Avign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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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이해하기 위해 외우는 것에 천착했던 비평가 조지 스타이너에서 시작해, 스타이너가 말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로, 기억에 관해 말한 마르셸 프루스트로 자연스럽게 수많은 텍스트가 모였다. 호드리게즈는 “처음 ‘바이 하트’ 작업을 시작하고 보니 8시간 분량의 텍스트가 모이더라. 축약하고 덜어내 무대 위에 펼쳐질 이 텍스트의 미로를 좀 더 작게 만들어 나갔다”고 했다. “아흔살 넘은 포르투갈 시골 마을의 요리사 할머니와 러시아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를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로 연결하는 이야기가 완성돼갔어요.”
호드리게즈는 “사실 소네트는 400여 년된 문학 형식이어서 영어 원어민들에게도 거리감이 있어 외우기 어려워 한다”고 했다. “이 작품 ‘바이 하트’를 가지고 제 모국어인 포르투갈어 뿐 아니라 프랑스어, 영어, 스페인어로도 공연했어요. 아테네에서 그리스 배우들과 작업했지만 그리스어는 못합니다. 한국어도 마찬가지고요. 100% 통제하지 못하는 언어로 공연을 만드는 것 자체가 도전이고 실험이죠. 그런데 사실 저는 모국어인 포르투갈어도 100% 통제하지 못해요. 누구나 마찬가지 아닌가요, 하하.”
◇”시에 관한 시, 연극에 관한 연극… 답보다 중요한 건 질문”
티아고 호드리게즈의 연극 소프루(Sopro)의 제목은 포르투갈어로 숨결, 호흡의 뜻.극장의 무대 뒤편에 존재하는 수많은 삶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대 위 배우에게 대사를 일러주는 프롬프터의 시선으로 들여다본다. /국립극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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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드리게즈는 2021년 서울 남산 국립극장에서 ‘소프루’(포르투갈어로 ‘숨, 호흡’을 의미)로 전회 매진을 기록했다. 포르투갈의 극장에서 수십년간 배우가 대사를 잊었을 때 속삭이듯 말해주는 ‘프롬프터’로 일한 사람의 회고담을 무대 위에 재현한 공연. 연극에 관한 연극,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는 그가 즐겨 탐구하는 주제다.
그는 “공연을 할 때 두 명의 관객을 생각한다”고 했다. “13살 때 저는 극장을 싫어하는 소년이었어요. 지금 47살의 저는 극장에서 공연하는 예술가죠. 이 두 관객이 모두 보고 싶고 즐길 수 있는 공연을 만들고 싶어요. 공연에 관한 공연을 좋아하는 건 그것이 관객에게 답이 아니라 질문을 주는 형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시대가 변하고 기술이 발전하고 틱톡과 숏폼이 대세여도, 관객이 모이고 무대 위에 사람이 있고 그걸 라이브로 지켜보는 경험의 본질적 가치는 지켜질 것”이라고도 했다. “극장에 가려면 지하철을 타거나 어렵게 주차하고, 어쩌면 비를 맞아야 할지도 모르죠. 불편한 의자에 모르는 사람들과 섞여 앉아서 춥거나 더운 곳에서 2~3시간을 보내야 하고요. 그런데도 우리는 계속 극장에 갑니다. 그곳에 우리를 예술과 연결하는 심오하고 긴급한 무언가가 있기 때문 아닐까요.” 그는 “팬데믹을 통해 우리는 예술을 위해 함께 한 공간에 모인다는 것이 얼마나 가치있는지 알게 됐다고 생각한다”고도 했다. “물론, 그 반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요, 하하.”
감미롭고 고요한 명상에 잠기며
지난 옛일을 추억 해 본다
내가 찾던 많은 것은 어디로 갔나
귀한 시간 낭비한 비애를 애탄하노라
죽음의 밤에 숨은 소중한 친구여
메말랐던 내 눈은 눈물에 잠기네
오래 전 끝난 사랑을 다시 슬퍼하고
사라져 버린 아픔을 탄식하노라
지난 날의 슬픔이 가슴을 후벼 파고
젖어들어 그 사연들 무거워 지니
전에 치른 슬픔 하나 하나 헤아려
아니 한 듯 새로이 아파하네.
친구여, 그대를 생각하면
상처는 아물고 슬픔은 끝나도다
소네트 30
윌리엄 셰익스피어
[이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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