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2.26 (목)

우금티 곳곳에 한스러운 지명 새기고 스러져간 이름없는 녹두꽃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지난 4일 충남 공주시 웅진동 곰내 어귀에 농민군 희생을 기억하기 위해 세운 ‘송장배미’ 조형물에 햇살이 비치고 있다. 정대하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 4일 오후 공주시 무령로에 있는 공주알밤빵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밤빵의 향기가 구수했다. 가게 한쪽 벽에 동학 등 지역 문화행사 홍보물이 붙어 있는 게 이색적이었다. 동학 농민군의 후손 주인 이원하(53)씨는 “한동안 동학은 남의 일로 여기고 살았다”고 말했다. 젊은 시절 축제 기획자로 일했던 그는 1996년 동학 공연 무대에도 섰지만, 정작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는 잘 몰랐다.



그러다가 당시 사단법인 동학농민전쟁 우금티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정선원(63) 박사한테 공주와 동학 농민군 이야기를 들었다. “풍물 활동으로 잘 알던 분이시지요. 그런데 제 고향 마을도 동학 전적지였더라고요. 아버지한테 물어봤더니 증조부 동학 얘기를 하신 거요.” 증조부 이승원(1851~1895)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 전투에 참여한 뒤 이웃집에 피신해 있다가 체포돼 이듬해 4월10일 처형됐다.



한겨레

동학 농민군의 후손 이원하 전 우금티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정대하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증조부 이씨가 살던 계룡면 화은리는 우금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공주 사람들은 우금치가 아니라 우금고개, 우금티로 불렀다. 부여에서 공주로 구불구불 넘어가는 우금티만 넘어가면 충청도 감영(현 공주사대부고)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우금티는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 때 최대의 격전지였다. 그의 증조부는 집안에서 ‘잊힌’ 인물이었다. 이씨는 “우리 집 ‘세대부’(전주이씨세보)에 증조할아버지 존함인 승자, 원자는 파열돼 있더라고요. 아버지가 한지를 덧대 이름을 다시 써넣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증조부는 2009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로 등록됐다. 이씨는 이 과정에서 이 일을 계기로 우금티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을 맡아 동학농민혁명 진상규명 활동에 힘을 보탰다.



이날 오전 동학농민혁명 공주전투 현장과 농민군들의 주검이 버려지듯 묻힌 곳을 찾아갔다. ‘동학농민혁명 시기 공주전투 연구’(2023)로 박사학위를 받은 정선원 공주동학연구회 회장의 도움을 받았다. 정 박사는 “공주전투는 1894년 10월(이하 음력)부터 11월까지 22일간 9차례 벌어졌다”고 말했다. 그간 공주전투 기간으로 알려진 18일간보다 4일간의 전투 행적을 더 찾아냈다.





동학농민혁명의 ‘결정적 공간’





한겨레

공주 동학농민혁명 전투 현장과 학살지를 찾아 수십년 동안 답사를 한 뒤 공주전투 박사학위 논문을 쓴 정선원 박사. 정대하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공주는 동학의 주요 포교 거점이자, 동학농민혁명의 ‘결정적 공간’이었다. 전봉준의 남접 농민군은 1894년 9월 반외세 기치를 내걸고 2차 봉기에 나선 뒤, 서울로 진격하기 위해 북상했다. 동학 교주 최시형은 9월18일 ‘동원령’을 내렸고, 손병희를 통령에 임명했다. 전봉준은 10월12일 논산에서 공주 지역 농민군 대장 이유상과 처음 만났다. 이유상은 전봉준보다 하루 앞선 10월15일 충청감사한테 선전포고했다. 정 박사는 “공주전투는 남북접 농민군뿐 아니라 충청 지역 농민군까지 가세해 처음으로 연합전선이 펼쳐진 전투였다”고 말했다.



공주전투엔 농민군 3만~10만여명(추정)이 참전했다. 충청남도가 낸 ‘충남동학농민혁명―전개와 역사적 의의’(2020)라는 책에서 유바다 고려대 교수는 2004~2009년 등록한 동학농민혁명 참가자 3644명 가운데 호남 지역 참가자가 2043명(56%), 충청 지역 참여자가 1103명(30.2%)에 달했다고 분석했다. 이 중 충남 지역 참여자가 816명으로, 전체 참여자 중 22.3%였다. 호남 지역을 제외하곤 충남 지역 참여자가 가장 많았던 셈이다.



공주전투 초창기 동학 농민군의 위세는 대단했다. 정 박사는 “공주에 있던 충청 감영을 점령하려고 우금티를 사이에 두고 30~40리를 포위했다”고 설명했다. 농민군은 11월8일 당시 우금티, 효포, 오실마을, 송장배미 등 네곳에서 동시에 조·일 진압군을 포위했다. 한때 이인역을 점령했던 농민군은 이튿날인 11월9일 공주 바깥 산줄기를 따라 우금티 등 네곳에서 큰 전투를 벌였다. 조·일 진압군의 최고 지휘부가 있던 견준봉(개좆배기) 옆 우금티에선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40분까지 40~50차례 공방이 펼쳐졌다.



조·일 연합군은 일본군 150명과 조선 정부군 800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화승총과 죽창을 지닌 농민군들이 사거리가 긴 영국제 신식 무기 스나이더를 지닌 일본군을 당해낼 수 없었다. 11월11일 효포에서 무너진 뒤 남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정 박사는 “전봉준 장군도 공주전투 때 일본군과 만난 그 순간, 판단을 정말 하기 힘들지 않았겠냐? 그는 네곳에서 동시에 공격해 승부를 결정지으려고 했다. 그런데 후세의 시각으로 전봉준 장군이 농민군들을 우금티 한곳에 몰아 대책 없이 공격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지명 곳곳에 새겨진 농민군의 한





한겨레

4일 공주시 봉정동 마을회관 앞에서 정선원 박사가 농민군들이 희생당한 뒤 전해져온 구전을 설명하고 있다. 정대하 기자


공주엔 무명 농민군들이 묻힌 곳이 많다. 웅진동 곰내 어귀 ‘송장배미’도 “주검들이 묻힌 논”이라는 뜻을 지닌 지명이다. 배미는 논을 세는 단위인데, 세 배미에 많은 농민군이 묻혔다. 정 박사는 “‘송장배미 전투’가 끝난 뒤 ‘논에 산 사람도 넣고 죽은 사람도 넣고 그랬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고 설명했다. 우금티기념사업회는 2000년 송장배미에 농민군의 죽음을 기념하는 조형물을 설치했다.



농민군 거점이었던 봉정동도 농민군의 희생이 컸다. 인근 승주골과 은골, 방죽골은 “당시 점심을 먹다가 일본군에게 몰살당한 농민군의 주검이 즐비해 공동묘지가 되었다”고 한다. 봉정동에선 3년을 두고 주검을 치웠고, 승주골에선 10여 가구 주민들이 농민군들의 주검이 무서워 모두 이주하기도 했다고 한다. 우금티기념사업회는 봉정동 마을회관 옆에 안내판을 세웠다.



계룡면 늘티 부근 ‘혈저천’이라는 지명도 동학 농민군의 죽음과 관련 있는 지명이다. 정 박사는 “혈저천의 ‘혈’은 피 혈 자고, ‘저’는 밑바닥 저(底) 자다. ‘갑오경장 난리 통에 냇가에서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어서 혈저천이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오실마을 부근 보아티들은 “농민군들이 ‘아이고 팔이야, 아이고 다리야’ 하고 죽은 자리”로, 해방 무렵까지도 밤에 사람이 못 돌아다녔던 곳이다. 공주전투에서 패한 농민군은 이듬해 3월까지 전라도 장흥과 해남, 그리고 황해도 등지에서 싸움을 이어갔다.



공주엔 동학농민군을 탄압했던 수탈자의 주검도 묻혀 있다. ‘만석보 학정’으로 동학농민혁명에 불씨를 댕긴 조병갑의 묘도 공주시 신풍면 평소리 사랑골에 있다. 이곳은 조병갑 집안의 세거지였다. 1898년 대한제국의 재판부 배석판사로 복귀한 조병갑은 5월29일 해월 최시형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그래서 조병갑의 묘는 지금도 ‘판사묘’로 불린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권력에 타협하지 않는 언론, 한겨레 [후원하기]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

▶▶행운을 높이는 오늘의 운세, 타로, 메뉴 추천 [확인하기]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