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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8 (금)

[기자의 시각] ‘포스트 한강’에게도 응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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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지난 12일 파주출판단지 인쇄소 '영신사'. 인쇄된 '희랍어 시간'과 '흰'을 접는 제본 작업이 한창이다. /황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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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담당 기자를 하는 동안 이토록 큰 뉴스를 다루게 될 줄은 몰랐다. 지난 10일 소설가 한강이 노벨 문학상을 받은 뒤부터 기사를 쏟아냈다. 도파민 과다 분비로 잠이 오지 않는 밤. 기사에 달린 댓글을 읽었다.

그중 눈에 띈 건 노벨상 발표 이후 서점가 풍경에 달린 반응. 발표 다음 날인 11일. 한강 책 구매를 위한 서점 ‘오픈 런’이 시작됐다. 24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30여 만 부가 팔려나갔다. 이날 오후쯤부터는 한강 소설 재고가 전국적으로 바닥나기 시작했다. 이런 내용의 기사에 국민의 ‘냄비 근성’을 욕하는 댓글도 수두룩했다. 훅 하고 끓어올랐다가 눈코 뜰 새 없이 차갑게 식어버리는 냄비. 한국인의 민족성을 자학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1년에 책 한 권도 안 읽는 사람들이 유난’이라는 반응이었다.

그런데 그 냄비가 단비를 내렸다. 지난 주말 출판사와 인쇄소에는 비상이 걸렸다. 인쇄소들은 11일 오후 급히 인쇄기를 돌리기 시작해 쉴 새 없이 기계를 굴렸다. 12일 오후 파주출판단지 인쇄소 두 곳을 찾았다. 숨 가쁘게 바빴지만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주말을 반납하고 특근에 나선 인쇄소의 베테랑 직원들은 “오랜만에 일이 많다”며 웃었다. 한국 최초 노벨 문학상 수상자의 책이 자기 손을 거친다는 자부심도 엿보였다. 한 직원은 손으로 ‘V’ 표시를 해보였다.

책을 사서 보고 싶다는 욕망은 귀해졌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 4월 발표한 국민 도서 실태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종합 독서율(1년 내 종이책·전자책·오디오북 등 1권이라도 읽은 비율)은 43%로 역대 최저다. 국민 여섯 중 하나는 1년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비율은 10년간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 출판사 영업이익도 덩달아 꺾였다. 출판문화협회에 따르면, 작년 주요 출판사 71곳의 영업이익은 1136억원으로 전년 대비 42.4% 감소했다. 문학과 책의 영향력이 갈수록 줄어드는 요즘, 출판계에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은 한 줄기 빛이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의 책을 갖고 싶고, 읽고 싶은 마음은 소중하다. 설령 그것이 뜨겁게 끓은 냄비라 할지라도 말이다. 인스타그램에 인증샷을 남기는 ‘지적 허영’을 부리고 싶어 책을 샀더라도, 그게 왜 나쁜가. ‘허영이 없으면 문화적으로 다음 단계로 도약할 수 없다’는 이동진 영화 평론가의 말이 최근 소셜미디어에서 자주 거론되고 있다.

한강 덕에 끓은 냄비가 출판계를 달궈 독서 인구가 늘어나는 계기가 된다면. 그래서 한국 문학계도 모처럼 활기를 띤다면. ‘포스트 한강’ 시대를 누리는 데 든든한 뒷배가 될 것이다. 김혜순·정보라·박상영 등 최근 해외에서 뜨겁게 주목받는 한국 문인들이 또 무슨 놀라운 일을 벌일지도 주목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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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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