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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5 (화)

[만물상] 비워둔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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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일러스트=김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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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일본 대지진 때 미야기현 유리아게에서 9m 쓰나미로 주민 5700여 명 중 750명 이상이 희생됐다. 유리아게중학교에서도 14명 학생이 목숨을 잃었다. 이듬해 학교 터에 위령비와 작은 가건물이 세워졌다. 여기엔 14명을 기억하기 위한 빈 의자와 책상, 칠판이 놓여 있다. 참사 현장이지만 주변에 트레킹 코스까지 개발해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유족들도 찬성했다.

▶우리는 제사 때 조상이 집으로 찾아온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제사상 빈자리엔 조상 이름이 써 붙여졌다. 어릴 적 제사엔 관심 없고 젯밥 생각뿐인데, 어른들은 조상님 오신다고 대문 열어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다음 단계가 초혼(招魂)인데 돌아가신 분의 혼을 부른다.

▶자리를 비워 망자를 기억하는 것은 동서(東西)가 다를 게 없다. 2021년 카불 공항 테러로 미군 13명이 숨졌다. 유해가 조국 땅에 도착하자 미국 곳곳의 식당과 술집에서 맥주 13잔을 올려놓고 테이블을 비워놨다. ‘예약석’이라는 팻말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13명을 위해’라는 메모가 놓였다. 빈자리를 둔 이발소까지 등장했다. 올해 2월 파리에서 열린 하마스 테러 추모식에는 사망한 프랑스인 또는 프랑스계 이스라엘인 42명의 초상화와 함께 실종자 3명을 위한 빈 의자가 함께 놓였다.

▶베트남전 이후 미군 식당이나 추모 행사장에선 ‘전사자 테이블’ ‘실종자 테이블’로 불리는 의식(儀式)이 생겼다. 이미 떠났으나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란 믿음을 담은 테이블인데 각각 의미가 있다. 하얀 식탁보는 조국의 부름에 응한 순수한 마음, 붉은 장미는 희생자의 피, 소금은 가족들의 눈물, 양초는 귀환을 위한 희망이다. 건배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잔은 뒤집혀 있다. 작년 한미 정상회담 오찬장에도 한미 장병을 위한 빈 테이블이 놓였다.

▶지난달 용산 전쟁기념관에선 6·25 때 포로로 잡혔거나 실종된 미군 7465명을 위한 테이블이 차려졌다. 참석자들은 7465명을 빠짐없이 호명했다. 이 행사는 6·25 때 실종된 미군 가족들에게 ‘우정의 액자’를 보내온 시민 단체가 주최했다. 한정윤 회장은 “그들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이 있다”고 했다. 13일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딸 결혼식장에도 ‘전사자 테이블’이 놓였고 한미 전우들을 위한 묵념의 시간도 있었다. 신부와 미국인 신랑 모두 장교 출신이다. 신랑 신부가 모두 장교 출신인 결혼식은 수없이 많았겠지만 그 자리에 전우들을 위해 비워둔 의자를 놓고 묵념까지 한 결혼식은 없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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