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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2 (토)

핵 확산의 시대, 노벨의 선택은 ‘日 반핵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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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상에 원폭 피해자단체 협의회

조선일보

올해 노벨평화상 수상 단체로 선정된 ‘일본 원수폭 피해자 단체 협의회(피단협)’의 미마키 도시유키 대표위원이 11일 히로시마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밝은 표정으로 소감을 말하고 있다(왼쪽 사진). 같은 날 피단협 도쿄지부 사무실에서 직원 마사코 구도씨가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오른쪽 사진). /로이터 뉴스1·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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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원자폭탄 피폭자 시민단체인 ‘일본 원수폭 피해자 단체 협의회(피단협, 일본어 발음 ‘히단쿄’)’가 올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11일 선정됐다. 피단협은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미국이 투하한 원폭 피폭자들이 1956년에 결성한 조직이다. 일본을 포함한 각국 정부와 유엔에 핵무기의 피해를 알리고 철폐를 주장하면서 피폭자 지원을 호소해왔다. 일본의 노벨평화상 수상은 1974년 핵을 만들지도, 가지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는 ‘비핵 3원칙’을 주창한 사토 에이사쿠 전 총리 이후 두 번째다.

이날 노르웨이의 노벨위원회는 “핵무기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노력과 증언을 통해 핵무기가 다시는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보여준 공로를 인정받았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미마키 도시유키(82) 대표 위원은 이날 노벨평화상 발표 후 “계속해서 핵무기 폐기와 항구적인 평화를 세계에 호소하겠다”고 말했다. 피단협엔 피폭 한국인들도 초창기부터 회원으로 참여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협회 관계자는 본지에 “재일 한국인 피폭자는 항상 함께 활동해왔다”고 했다.

일본의 원폭 피해자 단체인 ‘피단협’의 올해 노벨평화상 수상은 최근 세계 곳곳의 전쟁 탓에 핵무기 사용의 공포가 점점 커지는 가운데 이뤄졌다. 노벨위원회가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및 핵 개발을 추진해온 이란과 이스라엘의 충돌 등으로 핵무기의 위협이 커지는 데 대한 강력한 경고로 해석되고 있다. 러시아와 북한·이란·중국 등 반(反)서방 권위주의 국가들이 핵무기를 둘러싼 국제적 긴장을 연일 고조시키는 상황에 핵무기 사용의 참혹한 결과인 피폭자들의 반핵 목소리를 재조명함으로써 국제사회가 핵 확산 방지 및 사용 금지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함을 촉구한 것이다. 노벨위원회는 “핵무기가 인류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무기라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는 시점”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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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단협’의 종이학 로고 - 요르겐 와트네 프리드네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 위원장이 11일 올해 노벨평화상을 받게 된 일본원수폭피해자단체협의회(니혼 히단쿄) 로고가 표시된 스마트폰을 들어 보이고 있다. /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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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단협은 피폭자들이 목소리를 모아 본인들의 비극을 알려 핵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고 핵 확산을 저지하는 활동을 해왔다. 결성 당시 선언문에 담긴 “(원폭 피해자인) 우리는 자신을 구함과 동시에 우리의 체험을 통해 인류를 위기에서 구한다는 결의를 맹세한다”는 문구가 단체의 성격을 잘 요약한다. 피단협은 2001년 “핵무기도 전쟁도 없는 21세기를 목표로 삼아 싸워나가겠다”는 ‘21세기 피폭자 선언’을 발표했다. 원폭 투하 60주년인 2005년 유엔에서 열린 NPT(핵비확산조약) 재검토 회의에 대표를 파견하는 등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하지만 최근엔 원자폭탄이 투하된 지 79년이나 지나면서 피폭 생존자가 다수 세상을 뜨고 활동이 약화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가운데 노벨평화상 소식이 전해진 데 대해 일본에선 “예상치 못한 수상”이라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이날 오후 히로시마 시청에선 왼손 손가락 네 개가 피폭으로 문드러진 미마키 대표위원이 기자회견을 했다. 82세인 미마키 대표는 “우리의 이야기는 다음 세대로 계승할 필요가 있다. 일본에서만 호소해서도 안 되며, 세계를 상대로 호소해야 한다”고 말했다. 1942년생인 그는 세 살 때 히로시마에서 피폭됐다.

노벨위원회는 선정 이유에 대해 “피단협의 피폭자들은 자신들이 치른 값비싼 경험을 평화를 위한 희망을 키우기 위해 사용하기로 선택했다”고 했다. 위원회는 또 “이들의 특별한 노력으로 핵에 대한 금기(nuclear taboo)가 형성됐고, 덕분에 지난 80년 동안 핵무기는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핵무기 사용에 대한 이러한 금기가 큰 압박을 받고 있으며, 이는 매우 우려스럽다”고 했다. 이어 “핵 강대국들은 핵무기를 현대화하고, 새로운 국가들이 핵무기 획득을 준비하고 있으며, 현재 진행 중인 전쟁에서 핵무기를 사용하겠다는 위협이 계속되고 있다”고도 했다.

노벨위원회가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핵무기의 현대화’, ‘핵무기 획득의 준비’, ‘핵무기를 사용하겠다는 위협’은 각각 중국, 북한, 러시아·이란을 겨냥했다고 해석된다. 중국은 현재 500여 기로 추정되는 핵탄두 보유량을 2030년까지 1000여 기로 늘릴 전망이다. 또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극초음속 미사일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ICBM을 보관·발사하는 핵 격납고를 대거 건설하고 있다. 북한은 많은 제재 가운데서도 보유 핵탄두 수를 늘리고 소형화·다양화를 추진하면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개발에도 나서고 있다. 지난달 라파엘 그로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 입에서 “북한은 사실상 핵 보유국”이라는 발언까지 나올 정도로, 북핵은 통제권 밖으로 치닫는 상황이다. 이란은 고농축 우라늄 생산과 보유를 늘려 핵무기 제조 직전 단계까지 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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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별 핵탄두 보유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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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현실적인 위험은 러시아의 핵전쟁 위협 고조다.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는 탱크, 로켓·미사일, 전투기 등 서방의 우크라이나 지원 수위가 높아질 때마다 신형 발사체 실험, 핵 타격 모의 실험, 전술핵 배치 확대 등 단계적으로 핵 위협 수위를 높여왔다. 최근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직접 “우크라이나를 돕는 서방국가도 러시아의 핵 타격 대상으로 삼겠다”며 핵무기 사용 원칙(핵교리) 개정을 지시하기까지 했다. 이날 기자회견 때도 ‘러시아의 핵 위협을 염두에 둔 선정인가’라는 질문이 나왔는데 이에 대해 요르겐 와트네 프리드네스 위원장은 “핵무기를 사용하겠다는 위협은 핵 금기에 압박을 주고 있다”라며, 이번 선정에 러시아의 핵 위협에 대한 경고 성격도 있음을 사실상 확인했다.

이처럼 핵을 둘러싼 국제적 불안정성이 심화하면서 ‘핵무기 없는 세상’에 대한 희망은 멀어지고 있다는 평가가 많다. 1960년대부터 구축되어 온 핵비확산조약(NPT) 중심의 핵 억제 체제는 북한의 탈퇴(1993년) 후 핵 개발, 러시아의 핵 사용 위협 등으로 무력해졌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러시아와 미국 간 중거리핵전력조약(INF) 폐기, 러시아의 신전략무기감축협정(뉴스타트·New START) 참여 중단 및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 비준 철회 등으로 핵 억제 체제가 붕괴하고 있다”고 최근 분석했다. 일각에서는 한국의 핵무기 보유 여론 확산, 일본의 아시아판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를 통한 핵 공유 시도 역시 우려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프리드네스 노벨위원회 위원장은 기자회견에서 “피폭자들의 증언을 통해 핵무기 사용이 얼마나 용납될 수 없는 일인지 다시 한번 곱씹어야 한다. 세계의 모든 지도자가 그들에게 귀를 기울여 주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핵 확산 관련 데이터를 집계하는 스톡홀름 국제평화문제연구소(SIPRI)의 댄 스미스 소장은 이날 “오늘날 미국·러시아 및 각 진영 간의 관계는 냉전 이후 가장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다”며 “냉전 종식 후 배치되는 핵무기 수가 오히려 다시 증가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우려스러운 신호”라고 말했다. SIPRI가 지난 6월 발표한 연례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의 핵탄두 재고량은 (지난 1월 기준) 1만2121기로, 이 중 3904기가 즉각 실전에 투입 가능한 상태로 미사일·전투기 등에 장착돼 있다. 1년 전보다 60기 늘어난 수치다.

☞피단협

일본의 시민단체 ‘원수폭(原水爆) 피해자 단체 협의회’의 줄임말. 일본어 발음은 ‘히단쿄’. “원자폭탄·수소폭탄을 세상에서 없애자”는 운동을 하는 반핵 시민단체다. 히로시마·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1945년 이후 11년이 지난 1956년 나가사키에서 열린 ‘제2회 원수폭탄(원자·수소폭탄) 금지 세계 대회’를 계기로 결성됐다. 일본 정부의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병고와 빈곤에 시달리던 피폭자들이 직접 조직을 만들었다. 피단협엔 피폭 한국인들도 초창기부터 회원으로 참여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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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성호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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