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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 (목)

[신복룡의 신 영웅전] 쌍십절에 생각나는 ‘삼민주의’ 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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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쑨원(孫文·1866~1925·사진)은 중국 광둥(廣東)성 포산(佛山)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먹고살기 어려워 형 쑨메이(孫眉)가 먼저 하와이에 이민 가 어느 정도 성공하자 형을 찾아 태평양을 건넜다. 거기서 미국 민주주의와 영어를 일찍부터 배웠다. 4년 동안 살면서 종교 문제로 형과 뜻이 맞지 않아 귀국해 홍콩의학교를 졸업했다.

병원은 꽤 성황이었다. 어느 날 산보 삼아 홍콩의 영국인 공원에 갔다가 입장을 거절당했다. 경비원이 간판을 가리키는데 ‘개와 중국인은 입장할 수 없음(No dogs and Chinese allowed, 狗與華人不得入內)’이라고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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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문득 “나는 사람을 고치는 의사가 아니라 ‘나라를 고치는 의사’(國醫)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2년 만에 병원을 청산한 뒤 조국 혁명 전선에 뛰어들었다. 그해가 청일전쟁이 일어난 1894년으로 28세 때였다. 신산한 삶을 거쳐 신해혁명(1911년)에 성공했으나 권력에 탐닉한 위안스카이(袁世凱)와의 내전이 임박하자 임시대총통의 기득권을 양보하고 야인으로 돌아갔다.

그러던 사이에 쑨원은 일본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그 사회에 적응하려고 나카야마 키코리(中山樵)로 개명했다. 이때부터 중산(中山)이 그의 호로 굳어졌다. 한국인의 의식과는 아주 달랐다. 우리가 일제 시대의 이름을 이어서 썼더라면 어찌 됐을까.

1924년 중·일 갈등이 치열할 무렵 외과의사인 그는 몸의 이상을 직감했다. 암이었다. 살아서는 중국의 민주화와 자주를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해 강의를 시작했으나 네 번을 마치고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었다. 나머지를 유언 형식으로 후계자 장제스(蔣介石·1887~1975)에게 남기고 눈을 감았다. 민족·민권·민생을 역설한 『삼민주의(三民主義)』다. 역사가 영웅주의로 흐르는 것이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역사는 결국 영명한 지도자의 발자취였다.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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