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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 (목)

[김형석의 100년 산책] 육영수 여사와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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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나는 12명의 대통령과 함께 지났다. 열한 분의 영부인이 있었으나 직접 만나거나 대화를 나눈 분은 육영수 여사뿐이다. 김대중 때 이희호 여사는 상면한 적은 없었으나 ‘나라를 걱정하는 분’이라는 이력은 알고 있었다. 육영수 여사 기간에는 ‘양지회’라는 모임이 있었다. 국가 고위직 지도자들의 부인이 모여 공부도 하고 어떻게 나라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하는 뜻을 갖고 출발했다. 영부인이 회장이기 때문에 강사로 초청도 받고 인사를 나누곤 했다. 한때는 몇 교수와 대학 과정을 대신하는 강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



공부모임에 초청돼 강의 인연

서민 이해하려는 검소한 풍모

가난한 농부 애국심에 눈물도

국민 목소리 대통령에게 전달

서민 주부와 거리감 없애려고 노력

중앙일보

김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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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몇 가지 간접적으로 느낀 바가 있다. 육 여사와 청와대는 생각보다 검소한 생활을 했다. 육 여사는 대통령이 모르는 국민의 불만과 비판이 어떤 것인지 알아 대통령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의지를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국민, 그것도 서민 가정의 주부와 거리감이 없는 생각과 생활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뚜렷했다. 그분이 가진 영부인으로서의 애국심을 느꼈다.

기억에 남는 한 가지 일화가 있다. 동해안으로 북한 공비들이 침투한 사건이 있었다. 잡혀서 심문받은 사람도 있으나 한두 명은 체포하지 못했을 때였다. 그 공비를 보고 추격하던 한 시골 농부가 공비를 따라가다가 실패했다. 그러면서 한 얘기였다. ‘내가 운동화만 신고 있었으면 따라잡는 건데 고무신이 걸려 넘어지곤 했다’라는 고백이었다. 육 여사가 그 사실을 전해 듣고 많이 울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선량한 국민을 위해 한 일이 없는데, 그 농부는 우리보다 더 나라를 사랑했어요…”라면서 마음 아파했다. 나는 지금도 그 당시의 육 여사의 기분과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마음이 국민의 사랑을 받았고, 안타깝게도 공개된 행사장에서 흉탄을 맞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애석해하는 국민의 애국심을 일깨워 주었다. 평범한 국민의 한 사람으로 살았으면 깨닫지 못했을, 국가에 대한 주어진 무거운 짐을 항상 갖고 있던 마음을 기억한다.

숙명여대 운영 놓고 의견 경청

박정희 정권이 출범하고 1963년에 일본에서 우리나라 마지막 왕위를 계승했던 영친왕과 왕비였던 이방자 여사가 함께 귀국했다. 영친왕은 1970년에 작고하고, 일본 왕족 출신인 방자 여사는 1989년까지 한국에서 여러 가지 자선사업에 헌신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영친왕은 일본에서 국적을 상실했고 방자 여사는 자연히 한국 서민의 한 사람으로 남게 된 셈이다. 방자 여사의 한국에 관한 관심과 헌신적인 노력은 국민의 공감을 받았고, 국민은 왕비였던 예우를 해 주었다. 그즈음에 왕실의 도움을 받아 개설되었던 숙명대학의 경영권을 이방자 여사에게 넘겨주자는 여론과 잠재적 운동이 생겼다. 당시 문교부 장관의 발상이었다는 소식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그때 숙명여대는 4·19혁명 후에 탈 정부 중심적 국민 정서를 배경 삼는 민간 지도층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 4·19 교수단 시위를 주동했던 정석해 교수가 이사장이 되고 윤태림 교수가 총장직을 맡고 있었다. 실질적 주인이 없는 대학이기 때문에 이방자 여사에게 위임해 더 빠른 성장과 발전을 성취하자는 운동이 폭넓게 지지받고 있었다. 모든 결정권은 청와대가 행사하던 때였고, 박 정권은 국민의 여론과 숙명여대를 위해 어느 편을 선택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다른 일로 육 여사를 만났다. 육 여사가 나에게 숙명여대에 관한 여론과 소식을 들었을 것 같은데, 어떤 선택이 좋을 것 같으냐고 물었다. 나는 서슴지 않고 말했다.

“모든 언론기관과 대학, 은행, 큰 병원, 국민의 이익을 위한 공기관은 국민적 자율성에 맡겨야 한다. 미국 같은 선진국에서는 대학의 업적과 위상이 정부보다 앞서 있을 정도다. 우리나라의 사립대학들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대학의 주인이 따로 있다는 현실이다. 그중에서 연세대학과 이화여대는 이미 창설자의 간섭을 떠나 국민적 대학으로 탈바꿈했다. 고려대학도 소유주나 간섭자가 없는 공기관으로 자리 잡힌 지 오래다. 숙명여대는 정부나 소유의식을 가진 주체가 없는 공익기관으로 성장했는데, 이제 와서 주인 있는 준(準)정부 대학으로 격하해서는 안 된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 자주적 사명을 갖춘 사립대학으로 키워야 한다.” 육 여사의 표정이 약간 의외라는 느낌을 받았다.

조용히 해결된 숙명여대 문제

그리고 얼마 지난 뒤였다. 우연한 기회에 윤태림 숙명여대 총장을 만났다. 둘이 조용한 시간을 가졌을 때였다. 윤 총장이 “김 선생,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 나도 열심 있는 교인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신앙을 지켜왔습니다. 특별한 기도를 드리는 일은 별로 없었는데, 이번에 숙명대학의 운명과 장래를 위해서 많은 기도를 드려왔습니다. 내 책임도 컸으니까요. 이방자 여사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고 사립대학의 권위와 존엄성이 버림받아서는 안 되기 때문에 의지할 곳이 없어 기도드렸던 겁니다. 그런데 그 문제가 여론에서 조용해지고 잠잠하더니, 숙명여대에 대해서 더 문제 삼지 않는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임기를 끝내고 떠나도 편안한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기도드리기를 잘했습니다”라는 얘기를 해 주었다. 이사장이었던 정석해 교수도 “숙명 문제 때문에 고민했는데 말없이 조용히 해결되었다” 라고 얘기했던 기억이다.

나는 그 이후에 깊은 관심을 두지도 않았고 잊고 지냈다. 잘 되었다는 감사한 마음이었다. 지나간 사회적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 여사가 자진해서 나에게 물어보고 그 뜻을 대통령에게 전했는지, 혹시 박 대통령이 육 여사에게 김 교수 생각은 어떤지 물어보라는 뜻을 전했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일이 있을 수도 있다. 그저 이런 일도 있었다고 남기고 싶은 이야기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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