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훨씬 심각하다고는 해도 책의 위기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유튜브를 비롯한 동영상이 활자를, 책을 죽였다는 진단이 넘친다. 하지만 책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지금, 역설적이게도 인류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엄청난 양의 활자를 생산하고 있다. 소셜미디어 속 단문들은 물론이지만 책 자체가 넘쳐난다.
일러스트레이션 노병옥 |
조형근 | 사회학자
얼마 전 책을 냈다. 저자가 된 것이다. 글쓰기가 일상이라 늘 필자인 내게도 저자가 되는 건 드물고 귀한 경험이다. 내 이름을 단 한권의 책이 세상에 탄생하는 것이다. 저자에 책을 내보낸 심경은 노심초사 조마조마 각별하다. 또 있다. 내 책이 특별한 만큼이나 세상이 특별한 책들로 충만하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다른 저자들도 얼마나 특별한 존재일지 생각하다 보면 찔끔 눈물이 날 것만 같다. 세계저자연대 같은 조직이라도 만들어야 할 것 같다. 밤하늘의 별처럼 무수한 책, 하지만 그 찬란한 책 대부분은 곧 망각된다. 책에 대해, 글쓰기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지는 요즘이다.
책을 처음 접한 게 언제였을까? 무슨 책이었을까? 기억날 리 없다. 아마 삶의 꽤 이른 시기였을 것이다. 나는 책과 늘 가까운 편이었다. 중학교 때는 도서부에 들어갔다. 수업이 끝나면 매일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 독서보다는 아름다운 사서 선생님이 사주던 분식집 만두가 더 큰 기쁨이었다는 건 이제야 밝히는 고백이다. 카뮈의 ‘페스트’를 주제로 이웃 학교와 독서토론회를 열었는데, 중3에게는 그 자체가 부조리한 일이었던 것도 같다. 고등학교 때는 문예부였다. 여학교 시화전 쫓아다니기가 주목적이었지만 그래도 시란 과연 무엇일까, 고민하며 짐짓 행과 연을 이리저리 나누곤 하던 밤들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활자의 도파민에 매료된 중독자였고, 책벌레과에 속하는 곤충이었다.
내가 자라고 성인이 되는 동안 독서라는 취미는 꽤 근사한 아이템이었다. 지식을 얻고 교양을 살찌우며 세계와 삶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는 고전적인 효용 말고도 독서에는 유익함이 넘쳐났다. 취미를 묻는 말에 독서만큼 무난한 대답이 없었고, 친구와 연인의 생일에 소설이나 시집만큼 선물하기 좋은 사물이 없었다. 심지어 책은 읽지 않아도 좋았다. 책장을 가득 채운 책들은 디자이너의 미적 감각이 투영된 훌륭한 장식품이 된다. 서가의 분류 기준을 책등의 색깔로 한다는 이야기가 꽤 멋진 아이디어로 들려 시도하려다 엄두가 안 나 포기한 적도 있다. 게다가 세상은 서가에 가득한 저 읽지 않은 책들이야말로 내가 출판 문화에 순수하게 기여한 분량이라며 위로해주기까지 한다. 객쩍은 우스갯소리지만 고마울 따름이다.
책과 관계를 맺다 보면 특별한 순간이 찾아오기도 한다. 고등학교 1학년, 크리스마스 직전의 어느 날이었다. 문예부가 제작하는 교지의 오탈자를 잡기 위해 인쇄소에 갔다. 식자공이 활자를 활판에 꽂는 소리가 타닥타닥 울렸고, 나는 활자가 인쇄된 종이에 머리를 파묻은 채 오후 내내 오탈자를 찾았다. 내 손으로 책을 만들고 있다는 감각에 왠지 몸이 떨렸던 것 같다. 일을 마치고 막 대학 입시를 마친 선배가 알바로 일하던 시내의 커피숍을 찾았다. 일을 끝낸 그녀와 함께 거리를 걷는데 웬일로 부산의 거리에 눈이 내렸다. 잉크 냄새, 커피향 가득 밴 몸으로 눈을 맞으며 우리는 자꾸 걸었다. 거리에선 캐럴이 울렸고 나는 하염없이 행복했다.
그런 순간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어서일까? 어떤 사람들은 기어코 저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책을 쓰는 과정은 길고 지루하며 고통스러운데 세상에 나간 책은 금방 잊힌다. 철학자 롤랑 바르트는 텍스트의 창조자이자 의미를 결정짓는 주체로서의 “저자는 죽었다”고 말한 바 있다. 지금 한국에서 저자는 그냥 죽었다. 의미 이전에 생계가 문제다. 책을 써서 먹고산다는 희망은 로또 당첨을 바라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다. 분명히 로또에 당첨된 사람이 존재하지만 나는 절대 아니다. 분명히 성공한 저자가 존재하지만 나는 절대 아니다.
한국이 훨씬 심각하다고는 해도 책의 위기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유튜브를 비롯한 동영상이 활자를, 책을 죽였다는 진단이 넘친다. 하지만 책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지금, 역설적이게도 인류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엄청난 양의 활자를 생산하고 있다. 소셜미디어 속 단문들은 물론이지만 책 자체가 넘쳐난다. 유사 이래 지배계급의 독점물이던 문자가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공유재가 되었고, 글쓰기가 특권층의 지배수단에서 벗어나 모두의 무기가 되었다. 글쓰기 강연은 늘 북적대고, 언감생심 저자의 꿈을 실현하는 보통사람이 드물지 않다. 저자가 죽은 시대는 모두가 저자가 된 시대이기도 하다.
작가 장 그르니에는 산문 ‘글의 침묵’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무나 글을 쓰고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주워온 지식들로 길고 긴 논리를 편다. 천직의 고행을 거치지 않고도 많은 목소리들이, 무거운 말들이 도처에 가득하고, 숱하고 낯선 이름들이 글과 사색의 평등을 외치며 진열된다. 정성스러운 종이 위에 말 없는 장인이 깎은 고결한 활자들이 조심스럽게 찍히던 시대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멀리 떠나왔는가?”
저 아름다운 고전적 탄식으로부터 나는 얼마나 자유로울까? 이런저런 생각으로 뒤척이던 지난주의 어느 날이었다. 휴가 중에 머물던 제주의 장애인 숙소에서 오랫동안 발달장애인을 도와온 활동가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화제가 글쓰기와 책에 이르렀다. 그이는 발달장애인의 관점에서 보면 글쓰기가 얼마나 거대한 특권인지,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흩어진 말들을 서사화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특별한 일인지 가르쳐주었다. 공감하고 돕는다고 해서 메워질 수 없는 절망의 심연이 거기 있었다. 우리는 답 없이 대화를 맺었다.
수천년 동안 저자가 되는 것은 소수의 특권이었다. 오늘날 저자는 넘쳐나고 고결하지 않으며 낮은 곳에 머문다. 하지만 그토록 낮은 자리가 사실은 얼마나 특별한 장소였던가. 저자가 죽었고 아무나 글을 쓰는 시대라고 한다. 그 아무나가 글을 쓴다고 해서 활자 하나 생략할 수 없고 페이지 한장 건너뛸 수 없다. 한 글자씩, 한 페이지씩 몸으로 채워나가며 마지막 페이지에 닿아야 한다. 그러니 저자 아무개씨의 마음가짐도 각별해지는 것이다. 독자가 한 글자씩, 한 페이지씩 함께 걷고 있는지 물으며 써야 한다. 독자와 함께 창조하는 이 세계가 어떤 것인지 물으며 걸어야 한다. 그 몫을 온전히 감당할 때 우리는 비로소 저자가 된다. 아무나 책을 쓴다며 냉소하기는 쉽다. 하지만 그 아무나들의 이야기여서 이 세상이 특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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