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의 증명
최진영 지음, 은행나무 펴냄(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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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 식당에는 항상 같은 채널이 틀어져 있다. 식당에 갈 때마다 청소년의 사랑과 임신, 출산, 일상을 본다. 때마다 주위 탄식이 들린다. “쯧쯧. 또.” 처음 나온 출연자에게 ‘또’라고 반응하는 이유를 몇 번을 본 뒤 알았다. 출연자는 주로 여성 청소년. 고립된 그녀는 가정과 학교, 사회에 기댈 곳 없이 홀로 분투한다. 폭력과 외로움에 속이 곪는다. 그때 한 남자가 등장한다. 그는 그녀에게 다정한 말과 손길을 건네고, 그녀는 그를 믿는다. 사실 ‘그’밖에 믿을 존재가 없다. 연애와 함께 동거를 시작하고, 곧 임신한다. 자신의 의지, 타인의 권유, 울타리를 향한 욕망 등으로 임신 중지를 선택하지 않는(못한)다. 그 뒤 여러 갈등이 그녀를 덮친다. 각 사연은 고유하지만, 같은 뿌리를 가진 것만 같다.
패널들은 자주 한숨 쉰다. 벌써 사랑에 빠진다고? 그렇게 쉽게 동거를 결정해? 피임 좀 잘하지! 그 삶은 잘못되었다는 판단을 마친 뒤, 그녀가 등장한다. 나이와 계급, 위치. 다양한 이유로 ‘아래’에 놓인 출연자는 패널과 작가와 시청자의 훈계를 듣는다. 그녀가 어떤 고립과 고통과 기쁨을 통과하며 지금이 되었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모두 아는 것처럼 손가락질한다. 나와 상관없다는 듯 거리 두는 일은 그 사연을 ‘듣게 된’, 이런 일이 세상에 꽤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 존재가 자기를 지키기 위해 선택하는 가장 손쉬운 외면이다.
청소년의 사랑과 임신을 다룬 ‘고딩엄빠’의 한 장면. (장면은 본문의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MBN 방송 화면 갈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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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이, 그러나 뿌리로 연결된 이야기 속에서 나는 구와 담을 떠올린다. 이래서 두 사람은 구석을 찾았던 걸까? 최진영의 소설 ‘구의 증명’은 어떤 삶의 증명으로 읽힌다. 가족과 사회에서 소외된 구와 담은 어린 시절부터 서로에게 의지한다. 구는 가족의 빚을 떠안아 쫓기듯 살고, 담은 이모와 구에게만 의지하며 살아왔다. 긴 시간 둘은 계급의 선이 뚜렷한 세상을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낸다. 둘의 관계는 가까이서 보기에 세상이 추구하는 낭만적 사랑 자체지만, 배경이 선명해지면 순식간에 모든 게 “유치”해진다. 저런 상황에서 사랑과 낭만을 믿는다고? 서로를 위해 헤어져야지, 순진하네. 누군가 쉽게 말할 수 있겠지만, 막상 두 사람의 이야기로 들어가면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 관계만이 유일한 안식일 수밖에 없는 어떤 사연을. 끝이 뻔히 보여도 놓을 수 없는 절박한 기대 같은 것을. 쫓기고 쫓겨 구석으로 몰린 둘은 청설모가 되자며 세상 구석을 찾아 숨는다. 빚쟁이에게 발각된 구는 주검이 되어 담 앞에 놓인다. 담은 죽은 구를 먹는다. 자본과 권력의 탈을 쓴 ‘그들’에게 구를 넘겨줄 수 없다는 의지로 썩어가는 구를 먹는다.
“사람이란 뭘까. 구를 먹으며 생각했다. 나는 흉악범인가. 나는 사이코인가. 나는 변태성욕자인가. 마귀인가. 야만인인가. 식인종인가. 어떤 범주에도 나를 완전히 집어넣을 수 없었다. (…) 구는 길바닥에서 죽었다. 무엇이 구를 죽였는가. 나는 사람이길 원하는가.” 잔인해서 로맨틱한 책은 정글 같은 사회 속 ‘유치한 사랑’이 들어설 자리를 묻는다. 성교육의 부재, 사회 속 청소년의 자리, 정상 연애, 계급 사회를 논하기 전에, 그저 구와 담의 존재를 드러낸다. 당신이 한숨만 쉬는 동안 구석으로 밀려나는 숨이 있다고 말하듯. 담은 구를 천천히 뜯어 먹는다. 그것만이 구와 자신을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듯, 아무것도 남기지 않지 않도록. 잔인한 손가락질을 벗어나기 위해.
홍승은 집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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