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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내년 시력 60년 천양희…시 한 촉 밝힌 채 참회하다 울다 바라노니 [책&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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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지난해 11월15일 부산에서 ‘등단 60주년 기념 예술특별강연\'을 하는 천양희 시인. 행사는 대한민국예술원 주최, 시읽는문화 주관으로 열렸다. 관련 유튜브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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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몇차례 바람 속에서도 우리는 무사하였다
천양희 지음 l 창비 l 1만2000원



갓 등단한 시인의 푸릇한 초상이 아른댄다. 시의 간구, 시의 각오, 시의 참회, 시의 형벌이 매절 고백되고 있다. 시인의 나이 여든둘, 내년으로 시력 60년의 일이다. 1965년 등단한 시인 천양희의 새 시집 ‘몇차례 바람 속에서도 우리는 무사하였다’에서다. “시를 쓰는 너는/ 세상에 진 빚을 갚는 것이란다/ 가끔이라도/ 사람 마음에 다녀가는 너는/ 시인 아니냐”(102쪽). “시 쓰다가 날 선 종이에 손을 벨 때/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가끔씩 울 때/ 삶이란 학교에서 영원한 학생일 때// 그늘이 아름다운/ 빈자리가 필요하다”(80쪽). 시 한 촉 밝혀 “시의 오래된 거리”를 내내 걸었으니, 돌고 돌아 처음의 자리를 되찾고, 멀고 멀리 처음의 마음에 당도한 격이다.



그의 첫 시집이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1984)이다. 시종여일, 시인은 초심자의 묻는 일로 여념 없다. 아니 이제 더 물을 더 많은 날이 필요하다. “살펴보니/ 남은 건 물음표뿐/ 물음표는 물음표로 남아 있을 때/ 가장 강력하다는 말// 그 말을 타고 나는 달리고 싶지/ 저 너른 들판으로 멀리”(106~107쪽). “그때 비로소/ 나는 사람이 궁금한 사람이었고/ 마침내 나는/ 사람이 힘든 사람이란 걸 알았다//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길이보다 깊이를 생각하는 새 아침//…/ 처음으로 나는 눈사람처럼 하얗게 울었다”(129쪽)



열 번째 시집이므로 시인은 6년에 시집 한 권씩 펴낸 셈이다. 많지 않다. 결벽으로 결백해진다. “시 쓰는 동안 나는 무엇을 썼나//…// 모두를 위해/ 쓰지 못한 시를 찢어버린다”(88쪽)



육십갑자처럼 돌고 돌아 처음에 이르는 시의 도정은, 시와 시인, 시간을 달리하는 시인과 시인 사이 ‘나’와 ‘너’의 정결한 대화처럼 읽히는 시들로 한결 선명해진다. 가령 시 ‘뜻밖이었다’, ‘미래라는 마음’이 그러하다. 바야흐로 “강물”처럼 시공을 가로지른 두 시인의 대화가 적나라해진다. 오래전 “네살짜리 아이와 손잡고 언덕을 올랐을 때”다. 아이가 불쑥 바람의 나이를 묻는다. 시는 이렇게 이어진다.



“나는 궁색한 대로/ ‘바람은 나이가 없단다 잘 날이 없으니까’ / 대답했던 것인데/ 아이는 궁금한 것은 참을 수 없다는 듯/ ‘바람은 집이 어디야?’ 다시 물었다/ ‘바람은 집이 없단다 떠돌아다니니까’/ 바람 잘 날 없는 내가 / 그렇게 대답했던 것인데/ 길 위에서 아이는 어리둥절하고/ 몇차례 바람 속에서도/ 우리는 무사하였다”(‘바람은 몇살이야’ 중)



문내가 풋내로 뒤섞이는 들녘에서 시인은 무탈하다. 바람 불어, 시인이 이 가을 독자들에게 물어온 안부다.



“…/ 수런대는 들판이 만권의 책 같아//…// 쓸쓸이 재발할 때/ 나는 가을을 퇴고했네/ 딱 한줄 네 모습/ 나머지는 모두 여백이네//…// 책장을 덮어도/ 참으로 선한 가을이다”(‘책가을’ 중)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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