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4인극 뮤지컬 ‘리지’, 두산아트센터서 개막
대학로 실력파 여배우 단 4명이 강렬한 록 음악으로 무대를 꽉 채우는 뮤지컬 '리지'. 2020년 공연 사진. /쇼노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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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 콘서트 같았던 커튼콜이 끝나고 박수 소리도 잦아들 때쯤, 무대 위에 한 점만 밝히는 핀 조명이 들어왔다. 무대 맨 앞 가장자리, 날 선 도끼 한 자루가 반짝인다. 관객들이 도끼 앞에 줄을 서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이 그로테스크한 풍경, 뮤지컬 ‘리지’ 공연장에선 지난 두 시즌을 통해 벌써 익숙해졌다. 소셜미디어에도 이 도끼 사진이 넘쳐난다. 도대체 도끼가 뭐길래.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미제 사건
뮤지컬 ‘리지’가 서울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지난 14일 개막했다. 2009년 뉴욕 오프브로드웨이에서 초연이 무대에 올랐고, 국내에선 2020년 초연 뒤 이번이 세번째 시즌이다.
1892년 미칠 듯 더웠던 여름날, 미국 매사추세츠의 보든가(家) 저택에서 아버지와 계모가 집에서 살해됐다. 도끼로, 참혹하게. 부유한 사업가 아버지는 아내가 죽고 3년 뒤 재혼했는데, 리지와 언니인 엠마는 계모가 아버지의 재산을 노리고 결혼했다고 여겼다. 세상의 관심은 용의자로 지목된 두 딸 리지와 엠마, 가정부 브리짓에게 쏠린다. 뮤지컬 ‘리지’는 소설이나 영화로 다양하게 재해석됐던 미국의 미스터리 살인사건을 모티브 삼아, 억압적 부모와 여성을 옥죄는 사회를 극복해낸 여자들의 우애와 애정에 관한 이야기로 변주한다.
뮤지컬 '리지'의 캐스팅. 모두 폭발적 가창력으로 널리 사랑받는 배우들이다. /쇼노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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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뮤지컬 무대 위에 남자가 설 자리는 없다. 폭주하는 드럼과 기타의 굉음, 거친 듯 섬세한 로큰롤 넘버를 소화하는 건 단 4명의 여배우들이다. 배우들은 남자 배우 없는 무대에 대한 우려 따위 접어두라고 웅변이라도 하듯 숨 한번 몰아쉬지 않고 질주한다. 폭발적 에너지다.
‘리지’ 역에 김소향, 김려원, 이봄소리, ‘엠마’ 역에 여은과 이아름솔. ‘앨리스’ 역에 제이민, 유연정, 효은, ‘브리짓’은 이영미, 최현선이 맡았다. 모두 우리 뮤지컬에서 폭발적 가창력으로 널리 사랑받는 배우들이다.
◇코르셋 벗어 던지고 록 콘서트처럼 뜨겁게
부모의 죽음에 관한 스릴러 같았던 1막이 끝난 뒤, 진짜 하이라이트는 2막에 온다. 드센 언니 ‘엠마’에 이어 소심했던 동생 ‘리지’도 허리를 꽉 죈 코르셋과 정숙한 숙녀의 드레스를 벗어던지고, 스모키한 메이크업과 검은 스타킹에 몸에 착 달라붙는 가죽옷 차림으로 무대에 선다.
여성은 부모나 남편의 예속물로,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없는 덜된 인간으로 여겼던 것이 시대의 규범. “지금 여자가 욕망, 분노, 힘, 집요함, 증오를 가지고 살인을 저지를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살인 용의자로, 또 증인으로 법정에 선 세 여자는 득의만만한 미소를 띠고 법복 입은 남자들을 몰아붙인다. 여성을 하등한 인간 취급하던 시대 규범을 지켜야 하는 ‘신사’들은 이 여자들에게 무죄를 선고할 수밖에 없다.
보든가(家) 부부 살인 사건은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미제 사건 가운데 하나. 실제 사건에선 둘째 딸 리지가 유력한 용의자로 재판을 받으며 갖은 억측 속에 뜨거운 관심이 쏟아졌지만, 결국 증거 불충분으로 최종 무죄 석방됐다. 리지는 사건 당일 아버지의 시체를 가장 먼저 발견한 데다 알리바이도 진술도 불분명했다.
2020년 뮤지컬 '리지' 첫 시즌 공연 당시, 무대 앞에 꽂힌 도끼를 바라보고 있는 한 관객. /이태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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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모두가 자유를 얻은 뒤, 리지는 무대 앞 가장자리에 도끼를 꽂아놓고 떠난다. 경찰이 살인 흉기로 의심했지만 끝내 증명하지 못했던 그 도끼는, 억압하는 모든 것을 찢고 깨뜨렸던 여성들의 무기였다. 록과 메탈음악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은 고막 보호에 주의할 것.
서울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12월 1일까지, 6만6000원~8만8000원. 17세 이상 관람가.
[이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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