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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7 (화)

서로 딴 세상에 사는 사람들 [강준만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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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을 지지하는 시위대가 2021년 1월6일 대선 결과에 불복해 워싱턴 국회의사당 안으로 난입하고 있다. 한국 역시 미국과 함께 정치적 양극화와 대립이 가장 심한 나라로 꼽힌다. 워싱턴/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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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 전북대 명예교수



디지털 혁명은 무한대의 시장세분화를 가능케 함으로써 소비자들이 각자 자신의 성향에 딱 들어맞는 미디어와 콘텐츠만 소비할 수 있는 시대를 활짝 열어젖혔다. 개인적으론 축복일 수 있지만, 사회적으론 저주다. 개인적인 성향에 맞는 정보만 소비함으로써 사람들 간 소통을 단절시키는 ‘필터 버블’ 또는 ‘가두리’ 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날이 갈수록 ‘가두리 양식장’을 닮아가는 미디어 또는 플랫폼은 이윤 추구욕에 의해 작동되는 ‘알고리즘 독재’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개인의 자발적인 선택이라는 개념 자체를 농락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 점에서 최근 출간된 미국 작가 카일 차이카의 ‘필터월드’라는 책은 주목할 만하다. 필터월드는 “방대하고 널리 분산돼 있으면서도 서로 얽혀 있는 알고리즘 네트워크”를 설명하기 위해 차이카가 만든 말인데, 필터버블이 일상의 삶을 지배하는 세상으로 이해해도 무방하겠다. 차이카는 “알고리즘은 우리가 답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기도 전에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찾고 바라는 것을 앞서 추측해 결과를 내놓는다”며 “편리함에 빠져 자유의지와 주체성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경고한다.



문화적 취향의 영역은 획일화 또는 통합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차이카는 “알고리즘이 경험과 선택을 지배하게 되면서, 어느새 모든 사람이 똑같은 것에 열광하고 똑같은 것을 소비하게 됐다”고 주장한다. 소셜미디어 같은 디지털 플랫폼을 움직이는 알고리즘의 세계화로 인해 교토, 베를린, 베이징, 로스앤젤레스 등 세계 각지의 도시에 있는 카페나 에어비앤비 숙소의 분위기·가구·실내장식 등이 비슷하다는 걸 눈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각기 다른 소비자의 평화 공존이 가능한 문화적 취향의 영역과는 달리 승자 독식주의의 지배를 받는 정치적 성향의 영역은 진영 간 적대적 대결 구도를 전제로 한 진영 통합을 지향한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은 필터버블이 만들어낸 두개의 딴 세상을 실감 나게 느끼도록 만들어주었는데, 이에 대해 차이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온라인에서 민주당 지지자들은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데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었다. 트럼프 지지자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들 역시 자신의 관점을 강화하는 콘텐츠에 둘러싸여 다른 관점은 보지 못한다. (…) 알고리즘 추천 시스템은 사용자를 서로 겹칠 일 없는 두개의 정치적 범주로 깔끔하게 구분했다.”



그런 알고리즘 사업가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우리 인간은 한사코 자신의 자유의지와 주체성을 강변하는 경향이 있다. 그게 없는 자신의 모습은 상상하기조차 싫을 정도로 초라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허영심은 정치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상대 진영 사람들에 대한 적대감은 알고리즘에 의해 부풀려진 것임에도 그게 자신의 자유의지와 주체성에 따른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최근 어느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정치 성향이 다르면 연애나 결혼을 할 생각이 없다고 답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게다.



일부 유권자들은 상대편을 향해 ‘괴물’이라고 비난하지만, 자신들도 상대편에 의해 ‘괴물’로 불리고 있다는 걸 모른다. 물론 어렴풋이 알 수는 있겠지만, 상대편의 주장을 접할 기회조차 없이 우리 편의 선전·선동에만 매몰돼 있기 때문에 상대편의 생각에 무관심하다. 그러다 보니 양 진영에서 똑같이 난무하는 게 상대편에 대한 ‘악마화’다. 정파적 언론은 상대편 진영의 언행에 그럴 만한 합리적 이유가 있을 수 있다는 걸 인정하는 데에 매우 인색하다.



그 어떤 정치적 주장을 대할 때 옳고 그름을 따지는 건 날이 갈수록 무의미하게 되었다. 이 세상을 두개의 진영으로 갈라 각자 서로 딴 세상에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의 판단 기준이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우리 편을 기쁘게 하면 옳은 것이고 불쾌하게 하면 그른 것이다. 상대편과 처지를 바꾸어 생각한다는 역지사지는 삶의 경쟁력을 훼손하는 사치일 뿐만 아니라 적을 이롭게 만드는 배신이요 반역이 된다.



이대로 좋은가? 좋지 않다. 그럼에도 이런 문제는 정부의 정책적 고려의 대상이 되질 못한다. 그렇다면 시민단체라도 나서면 어떨까? 그러나 시민단체는 진영 전쟁의 선두에서 활약할 뿐 진영 간 상호 소통엔 별 관심이 없다. 시민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의로운 증오 감정의 발산 기회를 제공하는 시민단체나 미디어에만 지지와 지원을 보낼 뿐이다. 자멸을 향해 치닫는 진영 전쟁의 파괴성에 대한 환멸과 분노가 폭발할 때를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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